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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

창작자로서의 고민과 노력 :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 `양산형`인 이유

  양산형 판타지 소설, 약칭 양판소라는 말에는 주로 대여점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는(표현 그대로 하루에 십몇권씩 쏟아져서 나오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엔 이들 작품이 작가로서 오랜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행처럼 기존 작품을 보고 가볍게 모방하거나 만들어낸다는 느낌도 함께 담겨 있지요. 


  이들 양판소는 판타지 소설을 제대로 보고 판타지에 대해 생각한 사람들이 쓰는게 아닙니다. 단지 기존의 양판소를 보고 `이렇게 쓰면 되는구나`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판타지랍시고 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드래곤이 어쩌고 귀족이 어쩌고 마족이니 신족이 어쩌고 해봐야 기존의 양판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열화되기 쉽습니다.


  마치 복사한 종이를 다시 복사하고 그걸로 다시 복사하면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지저분해지는 것처럼....


  이러한 사례로서 이른바 클리셰, 즉 어디서 본듯한 장면이나 상황이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한편으로 작품 이야기와 설정이 전혀 맞지않거나 설정이 의미없이 사용되는 상황이 많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잘못된 설정이 시대(?)를 지나면서 계속 사용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대룡(고룡)`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드래곤(용)의 분류 중에서 매우 오래 전부터 살아서 그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존재가 된 용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를 영어로 바꾸면 `ancient dragon`, 즉, `에인션트 드래곤`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양판소에서는 이를 `에이션트 드래곤`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에인션트라고 쓰는 경우보다 에이션트라고 쓰는게 훨씬 늘어나게 되었지요.



[ 로도스섬 전기의 고룡. 국내에 알려진 고대룡의 모습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마치 말 전하기 게임에서 중간에 잘못 전달된 말이 계속 이어지듯 잘못된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잘못 번역된 `석궁` 같은 말이 계속 쓰이는 것도 비슷한 사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이션트 드래곤`이라는 말은 그 이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아예 그 개념 자체에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니까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양판소에 나온 `드래곤 중에 에이션트 드래곤이 있다.`라는 식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사용한 것이지요.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특히 이런 소설을 쓰는 이들이라면.


  하지만 `에이션트 드래곤` 같은 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저기 나온 클리셰를 생각없이 집어넣고 엘프니 드워프니 하는 걸 무작정 등장시키는 이들이라면 `양판소`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수없을 것입니다.


  생각없는 모방과 추종이야말로 `양산형`이라는 말로 불리는 원인이니까요.



  일본에서 `드래곤퀘스트`라는 게임이 등장한 이후 이른바 `드래곤퀘스트 같은 게임`이 쏟아져 나온 일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드래곤퀘스트`에 등장한 설정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일이 많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드래곤퀘스트식 슬라임`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서양판타지에서의 슬라임은 사실 젤리보다는 점액에 가까운 환수입니다. 칼로는 도저히 물리칠수없고 불이나 마법으로만 처리할수있는 존재이지요.



[ 서양 판타지 속의 슬라임. ( https://www.wizards.com/ ) ]



  하지만 `드래곤퀘스트`의 제작진들은 이 슬라임을 젤리처럼 만들고 눈과 입을 주어 귀여운 캐릭터로 재창조했습니다.


[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슬라임 가족. 무생물 같은 슬라임이 아닌 인격과 개성이 넘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이렇게 만들어진 슬라임은 가장 약한 몬스터이지만 그것 이외에도 다양한 매력과 특성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본래의 슬라임보다는 해파리에 가까운 느낌이라 칼에 베이지만, 그 탓에 둘로 분열하기도 하고 해파리 모양으로 하늘을 날고, 액체가 아닌 금속의 몸을 가진 메탈 슬라임이나 슬라임을 타고 다니는 슬라임 나이트, 치유마법을 쓰는 호이미 슬라임 등 다양한 몬스터로 발전하고 마스코트 캐릭터로 정착됩니다.


  여기에는 `드래곤퀘스트`만의 설정과 특성을 만들어내려는 제작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고민 없이 만들어진 `드래곤퀘스트를 닮은 게임`들은 단지 '슬라임은 약한 몬스터`라는 개념 만을 가지고 오면서 `던젼&드래곤스`같은 서양의 판타지 속 슬라임의 개성조차 잃어버린, 모양만 젤리인 약체 몬스터로서의 슬라임으로 남게되었습니다.


  지금도 드래곤퀘스트에는 수많은 매력적인 몬스터가 존재합니다. 단순히 능력치만 다른게 아니라 공격 방식이나 상성, 성격 등 많은 면에 차이가 있어서 전투의 재미를 높여주고 즐거움을 더합니다. 전투 하나만큼은 서양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보다 아기자기하고 TRPG에 가까운 재미를 느끼게 하지요.


  몬스터들에게 그들만의 개성을 주려한 드래곤퀘스트만의 고민과 노력은 이후 이들을 주역으로 한 만화나 게임 등으로 발전하였고, 포켓몬스터 같은 게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래곤퀘스트가 회를 거듭하며 팬의 관심을 끌며 인기를 거듭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 문화의 하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영도의 `드래곤라자`는 명작이지만 던젼&드래곤스 같은 작품의 설정을 무단으로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드래곤라자`가 이영도의 명성을 높여준 작품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뛰어난 판타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은 도깨비 같은 설정을 독자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하고자 했던 `피를 마시는 새`같은 작품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드래곤라자`조차도 다른 설정을 무작정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만의 세계와 설정으로 다시 낳았지만 말입니다.


  요즘의 양산형 판타지가 그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양판소`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결국 드래곤퀘스트의 제작진이나 이영도 처럼 `창작자로서의 생각과 고민`이 없이 `양산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에이션트 드래곤이란 용어는 그리고 흔히 이야기하듯 양산형 판타지 속에서 드래곤의 존재감이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모습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