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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

소드 마스터보다 중요한 것(다른 세계 모험가의 기본 상식?)

  타임머신이나 차원 이동 등의 기술로 과거의 시대, 이를테면 검과 마법으로 활개치는 판타지 세계로 향하여 활약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흔히 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기술(우리 세계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제리 퍼넬의 "용병" 이처럼 혼란한 세계라면 화약도 쓸만하겠지요. ]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것은 역시 화약(특히 흑색 화약). 초석과 유황과 숯을 적당한 비율로 섞기만 하면 만들 수 있는 이 물건은, 오랜 옛날 중국에서 개발된 이래 널리 사용되었지만, 적어도 ‘검과 마법의 시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례가 많기에 ‘이세계 모험물’에서 거의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소개되곤 하지요.


  왠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주인공이 도착하는 시대는 무조건 엄청난 혼란기. 게다가 주인공이 편을 드는 것은 대개 엄청나게 약한 나라.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그 시대에는 존재치 않는 엄청난 병기... 바로 흑색 화약이 필요하다는 발상은 비교적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재수생이나 따돌림당하던 고교생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화약을 만든다는 것은 그다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물론, 제리 퍼넬의 [용병(Janissaries)] 시리즈에서 나오듯 해박한 지식을 가진 용병 대원-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대원-들에겐 흑색 화약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화약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까짓 거 화약 하나면 판타지 시대는 평정 아냐’라고 생각하기 쉬우니까요.

(네. 그렇습니다. 화약 하나로는 솔직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실례로, 스페인의 잉카 정벌도 내분 상태가 아니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터. 역사적으로 화약을 가진 군대가 야만 군대에 패한 사례는 넘쳐나도록 많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논해 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만일 주인공이 도착한 시대가 평화 시기라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현명한 왕에 의해 통치되며, 전쟁의 'ㅈ'자도 보이지 않는 한가로운 시대라면...?


  이 사회 속에서 화약은 -주인공이 모 귀족과 짜고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고작 불꽃을 내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아무리 평화로운 시기라도 야만족이 침공하거나 하여 힘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필수품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서 PC(플레이어 캐릭터^^)는 어떤 기술을 사용해야 할까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아이템, “비누”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청결한 현대 사회에서 지저분한 판타지 세계로 넘어간 이상 PC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 문제’. 운 좋게 판타지 세계에 비누가 있다면 좋겠지만(사실, 비누의 역사는 -비교적 현재와 비슷한 것만 생각해도- 1000년을 넘어서기 때문에, 정상적인 판타지 세계라면 조금 비싸긴 해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혹은 이방인인 주인공이 사기 어렵다면, 어떻게든 만들어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비누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습니다. 기름을 알칼리 용액과 반응시키기만 하면 되니까요.


  가장 좋은 건 해초를 태운 재를 기름과 섞는 것이지만, 해초를 구하기 어렵다면 그냥 나무를 태운 재(잿물)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비누처럼 좋은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아마 빨랫비누보다 못할지도 모르지만, 로마에서처럼 오줌을 삭혀서 빨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참고로, 최초의 비누는 제물로 바친 동물의 기름과 나뭇재가 섞여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비누의 역사는 최소한 2000년 이상. 어쩌면 인류 문명의 역사에 필적할지도 모르지요.



  자, 이렇게 해서 '비누'라는 슈퍼 아이템으로 최소한 먼지 투성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면, 다음에는 보다 다양한 '청결 이론'을 통해서 스스로의 생존 확률을 높이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대부분의 병이 '세균'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과 1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혁명적인 이론이지만, 현대 사회에는 그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요.


  어떻게 하면 세균을 막을 수 있는가? 이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비누를 써서 손을 씻는 일은 기본. 물을 끓여 마시고(가능하면 증류해서 마시고), 상처는 독한 알콜 같은 것으로 소독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 피부에 닿는 도구는 불에 달구거나 끓이거나 알콜로 소독해서 쓴다는 정도 만으로, 판타지 세계 속의 생존률을 급격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청결 이론'을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세상도 바꾸어 나갈 수 있지요.


  화약은 전쟁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비누와 뜨거운 물’을 중심으로 한 ‘청결 이론’은 그 시대의 역사를 엄청나게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아기들이 태어나면서 감염되어 죽는 일이 줄어들 테니 출생률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전염병으로 죽는 희생자가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역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지요. 사람들의 수명이 조금 더 늘어나고, 죽는 사람이 조금 더 줄어드는 세상...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히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변화를...


  고작 해야 비누 하나, 고작 해야 끓인 물... 하지만, 그것 하나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이상으로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이들이 판타지 세계로 향한다면 과연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런 것을 통해서 ‘이세계 모험물’이라는 것이 단지, 왕따 학생을 인기 만발의 소드 마스터로 만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어쨌든 ‘다른 세계’라는 상황은, 정말로 완전히 다른 세계.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세상이 뒤집힐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더욱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나 능력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점입니다.


  아이폰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스티브 잡스의 놀라운 프레젠테이션 솜씨가 아니었다면 그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지식이나 기술도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전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을 납득시켜야 합니다. 설사 권력을 가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가령 '산파들의 더러운 손 때문에 태아나 산모가 감염되어 죽는다'라고 이야기해 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산파들은 도리어 자신들을 모함한다며 불만을 품겠죠.


  이에 대해서 '용병'에서 주인공은 같은 일을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방법이 나빴던 거야. 난 질병은 조그만 악마들 탓에 일어나는 거고, 축복받은 비누와 끓인 성수를 사용하면 그 악마들을 쫓을 수 있다고 가르쳤어. 이런 식으로 하면 그들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어."


  다른 세계 모험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그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놀라운 기술과 지식보다도 그것을 그 세계에 적절하게 전하려는 마음 가짐과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문명이 뒤쳐진 세계라고 해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 세계 최강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자. 어쩌면 소드 마스터보다도 이 같은 능력이 다른 세계 모험에 필요할지 모릅니다. ]



여담 ) 개인적으로 ‘이세계 모험물’에서는 ‘서로 의식이 다른 것’을 잘 연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바로 이 시대에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에서 나오지만, 판타지나 다른 세계의 의식은 그 세계 만의 삶에서 흘러나온 것이니까요.

  생각해 볼까요?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귀족은 스스로 ‘푸른 피’라고 불렀을까요? (사실 이 '푸른 피'라는 용어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을 침공한 창백한 피부의 야만족들이 '파란피를 가졌다.'라고 생각해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만...) 하지만, 요즘 세상의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람은- 그런 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여담 ) 그러고 보면 [타임슬립 닥터 진]이라는 만화에서는 에도시대(대략 130여 년 전)로 넘어간 외과의가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시대의 의료 혁명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양한 외과 수술만이 아니라 콜레라와 싸우고, 심지어 페니실린을 만들어 매독을 치료하기도 하지요.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의 변이’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하튼 비누와 뜨거운 물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출생률은 급각하게 올라가게 마련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