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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

독특하고 흥미로운 역사 판타지

SF에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판타지에도 스타일이나 형식, 소재 등에 따라 다채로운 장르가 존재합니다. 그 중 가장 널리 대중적인 것은 역시 '검과 마법 이야기(Sword&Sorcery)'이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판타지로서 흥미를 끌고 있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역사 판타지'입니다. SF에서는 대체 역사나 스팀펑크 같은 장르와 대비할 수 있는 역사 판타지는 역사적 사실을 무대로 판타지의 요소를 넣어서 이야기를 꾸며내는 장르입니다. 당연히 실존 인물이 등장하고, 당시대의 상황을 판타지로서 해석한다는 점이 흥미롭죠.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판타지는 역시 게임으로 잘 알려진, 김진씨의 '바람의 나라'입니다.




고구려 초기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고대'에서 연상되는 것과 달리 상당히 화려한 복식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건 역시 사신수라는 존재를 의인화하여 왕의 신하로서 등장시키는 등, 판타지 요소의 도입이라고 하겠군요. 이야기의 흐름은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여기에 판타지라는 개념이 추가됨으로써 이야기의 내면이 달라지고 그만큼 흥미롭게 만듭니다.


안타깝게도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표절 시비가 있었던 모 드라마와의 유사성을 피하려고 했는지, 가장 중요한 이들 판타지 요소를 제외함으로써 그 맛을 살리지 못하고 말았지요.



한편, 퇴마록의 저자인 이우혁씨가 쓴 "왜란종결자" 역시 임진왜란이라는 시대를 무대로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흥미를 끈 작품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국내에서 역사 판타지를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암행어사 같은 작품도 있긴 하지만, 박문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긴 해도 역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문제가 있을까요? (물론, 역사 판타지라고 해서 역사 그대로 가야 하는 법은 없는 만큼, 이 역시 역사 판타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창작물이 많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역사 판타지나 대체 역사 작품의 비율은 그 중에서도 특히 낮은 편입니다.



반면, 외국에는 역사 판타지가 꽤 많이 존재하는데, 실례로 중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은나라와 주나라 전쟁을 소재로 한 '봉신방(봉신연의)'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으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서 영감을 얻은 '서유기' 같은 작품이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로 호평받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임진록" 같은게 있긴 합니다. 난데없이 관운장이 나타나 가등청정(가토 키요마사)을 베어버리는 등,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 있죠. (기왕이면 관운장 대신 을지문덕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 같은 인물이 나오면 안 되는걸까요? 아니면 태조 이성계가 후손들을 위해 강림하신다거나...)


하지만 "임진록"은 역사 판타지나 대체역사라기보다는 그냥 자위적인 작품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패전이라 생각한(물론 침공을 용인한 시점에서 이미 지고 시작한게 맞습니다만) 작가가 '아니야. 우린 이겼어.'라고 우기는 내용에 가까우니까요. 판타지적 요소라고 해도 뭔가 그럴 듯한 면이 있어야 할텐데, 뜬금없이 관운장이 튀어나오는 등 그냥 망상에 가까운 느낌이지요.



역사 판타지의 재미는 무엇보다도 역사 속의 상황, 그리고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여기에 환상적이고, 기이한 내용들이 추가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역사에 가깝게 흘러가지만, 그 뒷면에서는 온갖 종류의 환상과 기담이 넘쳐나는 것이 재미있지요.


'우리는 전쟁에 이겼어.' 같은 자위적인 목적으로 신장인 관운장을 등장시키는 것만으로 역사 판타지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겁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면 세계도 정복했어.'라는 이야기를 SF로서의 대체역사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요.)



대체 역사 작품이 미국에서 많이 나오듯, 역사 판타지는 일본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게임과 애니메이션에서 이들 작품을 수없이 볼 수 있죠.


그 중에서도 인기있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활약한 전국 시대 말기의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삼국지, 신장의 야망으로 유명한 코에이에서도 오다 노부나가에게 고향을 잃은 이가 닌자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복수하고자 떠난다는, "이인도 타도신장(伊忍道 打倒信長)"이라는 작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서양의 요괴들을 끌어들여 일본을 어지럽힌다는 내용의 '요술사편'을 두어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연출하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귀무자'니 '전국바사라'니 하는 작품이 있었고, 만화로도 '브레이브 10'이나 '사나다 10용사 대 팔견전'처럼 다양한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때때로 '전국 판타지'(전국 시대 배경의 판타지)라는 말까지 사용할 정도니까요.


[ 최근 재미있게 하고 있는 귀무자Soul. 여러가지 할게 많다는게 재미습니다. 역사 대로...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악당인 노부나가가 활개치는게 열받지만. ]


물론 전국 시대만이 무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실례로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의 야마토편은 일본 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초기 역사의 이야기에 판타지(물론 전체 내용을 볼때 SF로 볼 수도 있음)를 도입한 작품이거든요. (이 밖에도 이 시대를 무대로 한 일본의 만화, 소설은 적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상당한 수의 역사 판타지가 존재합니다. 아니, 도리어 하이 판타지(작가가 창작한 임의의 세계에서 이야기를 펼쳐내는 판타지)보다는 역사 판타지를 중심으로 한 로우 판타지(현실 세계나 그와 비슷한 세계를 무대로 한 판타지)가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어쩌면 이는 이들이 가진 종교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비교적 가까운 원평 합전(겐페이 합전) 시대만 해도, 우시와카마루(훗날의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텐구에게 무술을 배웠다는 전설 등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곳곳의 신사마다 다채로운 전설과 설화가 있으니 이들이 엮여서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서 역사 판타지는 아니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무대로 한 듯한 이누야샤 같은 작품이 넘쳐나는 것도 비단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역사 판타지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마도 '현실성'을 중시하는 우리네 성향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고증의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사극에서 역사적 고증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 역시 소재의 하나라고 가정하면, 역사를 무대로 판타지나, 대체 역사를 펼쳐내는 것도 꽤 재미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