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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야기

S는 과학의 S, F는 상상의 F...

1967년의 오늘.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사망했습니다.



[ Buffalo News의 Adam Zyglis가 그린 오펜하이머 ]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사실상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가 별 역할을 못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가 핵폭탄 개발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 핵폭탄을 통해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인류를 멸망시켜 버릴지도 모르는 폭탄을 보게 되면 더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의 능력도 탁월한 것이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핵폭탄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위력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너도 나도 없이 핵병기 개발에 열중하고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원자폭탄의 사용과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여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재앙이 수없이 증식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물러나야만 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전쟁을 막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냉전이라는 시기가 찾아왔기 때문이죠. 두 거대 강대국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로 서로를 겨누는 상황에서 전면전은 그야말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침공 등 크고 작은 전쟁은 있었지만, 제3차 세계대전만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오펜하이머가 만들어낸 핵폭탄의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역시 그의 의도는 아니었고,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쿠바 사태나 베를린 위기처럼 전면핵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일은 결코 적지 않았거든요.



흔히 과학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상상(Imagine)이라는 것은 단순한 망상이나 공상과 달리 아는게 많고 생각을 많이 한 사람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은 어느 정도 근거가 필요하며 고민을 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아는게 많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과학자들은 분명히 상상력이 뛰어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상력이 반드시 적절하다고 할 수 만은 없습니다.


실례로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이 완성되면 "전쟁의 무의미함"을 느낄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자들이 핵폭탄의 위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리어 그 핵폭탄을 더 열심히 만들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문득 일본에서 '인분고기(즉 똥으로 만든 고기)'를 만든 과학자가 떠오릅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분 고기는 친환경적인 음식이므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 똥으로 만든 고기를 들고 있는 미츠유키 이케다 박사 ]


이 과학자분은 분명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음식의 찌꺼기인 똥으로 고기를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인식이 바뀌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고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고기를 사료라던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식품이니 사람들이 먹어야 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 80여년 전 '감자', '배따라기' 등의 작가인 김동인씨는 한국 최초의 창작 SF 중 하나로 알려진 "K 박사의 연구"에서 똥으로 대체 식량을 만드는 K 박사라는 사람의 비극(?)을 그려냈습니다. 시식회에서 맛있게 먹은 사람들이 재료를 밝히자마자 토하고 난리가 나는 광경을 통해서...


80년전의 작가. 당연히 과학적 지식은 일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똥으로 음식을 만들었을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며, 속아서 먹고난 뒤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정도는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김동인. 그는 SF작가가 아니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



1929년의 오늘 '일본 SF의 혼'이라 불리는 작가이자 편집자인 후쿠시마 마사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50년 넘게 계속되는 SF 잡지 '일본 SF 매거진'을 창간하고 최초의 성공적인 SF 문고(그리고 일본 작가의 작품으로만 1000권이 넘게 나온) '하야카와 SF 문고' 등을 만들고, 일본 SF 작가 협회를 만든 사람으로서 기억됩니다.


[ 후쿠시마 마사미의 회상록. '미답의 시대'. 초기 일본 SF사를 잘 알게 해 주는 책이다. ]


48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가 아니었다면 일본 SF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죠.


한편 그는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SF와 관련하여 다양한 논쟁 거리를 던진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중 하나로 'SF를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SF(Science Fiction)를 과학소설로 부를 것인가. 아니면 공상과학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문학 출신의 평론가들은 SF는 과학이 중요하니 '과학 소설'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후쿠시마 마사미를 비롯한 SF팬들은 SF는 어디까지나 꾸며진 이야기이고 자유롭게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므로 '공상 과학'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논쟁 끝에 일본에서는 공상 과학이라는 용어가 좀 더 널리 사용되며 한국에까지 유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SF를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공상'이라는 말이 상당히 부정적인 느낌이 있는 만큼 '공상과학'은 SF팬들에게 호감을 살만한 용어는 아닙니다. 경기를 잃으키며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SF(Science Fiction)에서 과학의 S가 아니라 가상(상상, 공상?)의 F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F에서는 단순히 '과학'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분명히 탁월한 과학자였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핵폭탄을 만드는데 열정을 쏟았고 결국은 자신이 만들어낸 절망의 무게에 눌리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냉전이 찾아와 3차 대전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핵전쟁이 일어나고 인류는 멸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그리고 맨하탄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에게 충분한 '과학적 상상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핵폭탄이 가져올 끔찍한 미래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과학'은 있었으되, '상상'이 없었고, 결국 인류가 자신을 몇 번이고 멸망시킬 핵폭탄을 소유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죽고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 영화를 틀어주었습니다.


"그날이 오면(The Day After)"이라는 이름의 그 영화는 핵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의 한 지방 도시가 핵 공격을 받은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평화로운 느낌의 전원 도시 외각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극적인 반전을 맞이합니다. 오염된 땅은 흙을 완전히 바꾸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방송국에서는 여러 과학자를 초빙하여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시청자의 의견을 듣기 위한 전화를 열어두었지요.


그러나 대담이 끝날때까지 방송국에는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방송을 안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전화를 걸 생각조차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핵전쟁이 일어나도 나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핵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적을 무찔러야 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과학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영화의 장면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반전, 반핵 단체가 늘어나고 핵폭탄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 핵무기 감축 협상과 전략 무기 감축 협정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게시판에서 한 분이 '과학은 인간에 대한 긍정을 만들어낼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은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상상이 없는 과학은 그 발전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 수 있다.'



2월 18일. SF에서 과학이 중요한지 상상이 중요한지의 논쟁을 격화시킨(한편으로는 일본의 SF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한) 한 작가이자 편집자가 태어나고, 인류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기에 빠뜨렸던 과학자가 사망한 이날만큼은, 우리에게 '과학'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과학적 상상(SF)'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