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2014.03.14 22:55

역사 다큐멘터리 전문의 히스토리 채널에서 새로운 방송이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Going Medieval". 번역하면 "중세로 가는 중?(중세로의 여정)" 정도가 될까요.


실제 중세 시대의 생활을 체험하는 방송으로, 중세 시대의 음식을 먹고 중세 식으로 빨래를 하고, 중세의 치료법을 시험해 보는 등... 그야말로 중세를 여행하는 기록이죠.


다양한 내용이 있는데, 제가 알고 있던 중세에 대한 오해를 많이 바꾸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가령, 중세 시대에도 빨래와 목욕용 비누가 있었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누구나 널리 사용했다는군요.


칫솔은 없었지만, 이른바 대체품 같은게 있었고요.



게다가 중세 사람들은 세균 감염은 몰랐지만, 최소한 좋지 않은 공기가 병을 옮기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알았고, 살균 효과가 있는 허브를 가지고 다니며 향기를 맡곤 했다고 하죠.


더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아래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은 사진으로 방송에서는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방송에서도 나오긴 하는데, 이건 흑사병이 유행했을 당시 의사의 복장이라고 합니다.


두꺼운 천에 얼굴 부분은 밀납으로 밀봉해서 공기가 잘 통하지 않게 했고, 안에는 식초에 절인 스폰지나 살균 효과가 있는 허브를 넣어두었다고 하죠. 다시 말해 중세 시대의 방독면이나 차폐복인 것입니다.


게다가 환자들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고자 약을 전하는 긴 수저를 가지고 다녔고 말이지요.



물론 저들의 치료가 흑사병을 낳게 하는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고 그로 인해 유럽 인구의 절반이 죽게 되었습니다만...


이처럼 여기선 중세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시리즈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중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준 방송인지라 정말로 마음에 드네요.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역사 이야기 2014.03.01 23:44



  총포의 발명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기는 이른바 근대라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장에 선보였다.

  이들은 그후 전장에서 다채로운 활약을 보여주게 되는데, 그 중 화포는 특히 당시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오스만투르크에 의해서 공성병기로서 활용되어, 콘스탄티노플 전투 등에서 위용을 발휘하였다.

(* 포의 경우는 중국 송나라 때로 추정되나, 총의 경우는 14세기 중국의 화포가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포는 상당한 대형이었고 운용에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존의 병과와는 별개로 운용되었다. 포는 특히 공성전에 있어서 고래로부터 사용되어 왔던 다양한 공성병기들을 대체하였으며(주로, 망고넬(투석기)과 캐터펄트(노포)를 대체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공성부대(혹은 포병)이라고 불리던 병과는 이제 화포라 불리는 최신의 병기로 무장한 부대로 바뀌게 된다.


  처음에는 공성병기로만 사용되던 함포는 동양에서, 그리고 서양에서, 그것의 무게를 견디고 수송할 수 있는 함선과 연결됨으로서 해전(혹은 수전)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초기에 공성 병기로 활용되던 함선의 함포는, 15~16세기에 들어 영국, 조선 등지에서 해전에 도입됨으로서 해상 전투의 전술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조선의 화포 기술은 당시 동양권에서 (특히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그다지 우수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함포는 해군에서 널리 응용되긴 하였으나, 이것은 기술적인 면의 진보가 아니라 단지 함포를 열심히 쓰고자 한 이들의 노력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신기전이나 비격진천뢰 같은 병기는 이미 중국에서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던 것이었으며, 일본의 경우만 해도 이미 오다 노부나가 등이 철제 대포를 도입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천자총통 등은 아직 청동제로 되어 있어 빠르게, 많이 발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가 육군에서도 화포를 도입해서 운용했던 것과는 달리(명-청 전쟁 당시 청의 기마 군대는 명의 화포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수군에서만 활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수군의 이점은 화포 기술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주로 함포전을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함선을 설계하고 이를 충실하게 운용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벽에 대한 무모한 돌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측은 먼 거리에서 다수의 화포로 성벽을 적중시키고 무너진 성벽을 통해 부대를 돌입시켰다. 기사들의 용맹도 왕의 위엄도 화포 앞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기술자와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 활약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전적인 개념의 높고 위압적인 거성들은 낮고 두꺼운 근대식 성벽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더 이상 마을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성곽은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영주의 의해 만들어지던 성벽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넓은 차원에서 전략적 거점에 방어용으로 세워지는 요새들이 중심이 되어 갔다. 이런 지역은 영주의 영토 바깥에 있었고, 왕의 권한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성에 의존한 영주들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었다.



  왕은 화포 기술을 국가 시책으로 독점하였으며 어떤 영주도 그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영주들의 성들은 하나둘 해체되어 갔다.



  더욱이 해전에서도 기사와 맹장들이 활약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함포 기술은 가까이 붙을 필요없이 먼 거리에서 적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으며, 대포를 쏘는데는 강철의 갑주와 용맹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육박전이 사라짐에 따라서 유사시 노수들이 전투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갈레선이 사라지고, 대형의 갈레온이 이 뒤를 이었지만, 곧 작고 가벼우면서도 함포 공격력에 치중한 프리깃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 배에는 더 이상 육박전용의 해병대가 필요치 않았다. 멀미나 하는 육군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해군 지휘관들은 그들을 기꺼이 배에서 추방하였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정확하게 함포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수병들이 뒤를 이었다. 육체 노동을 하는 수병은 물론 필요하였지만, 무거운 갑주는 배위에서 부담이 될 뿐이었고, 포병들은 이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수병의 지휘관들도 바뀌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함선에는 오랫동안 배 위에서 생활해온 이들이 지휘관으로 탑승하게 된 것이다. 애꾸눈도, 절름발이도 능력만 있다면 수병의 지휘를 맡을 수 있었고, 활약할 수 있었다.



  14세기 경에 화포의 축소형으로서 개발되었던 소총은 15~16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당초 대포와 마찬가지로 지연 신관(심지)을 이용하여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스타일로 개발되어, 총이라기보다는 포라고 하는게 어울리는 이 병기는 스프링에 의한 격발 장치의 도입으로 인해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화승총으로 변화함으로서 보다 높은 효율을 갖게 되었지만, 실상 전장에서는 그다지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화승총은 총구를 청소하고, 화약을 부은 후에 탄알을 넣고(때로는 종이 등을 채워 넣어 총알이 굴러 나오지 않게 하고) 다시 화승의 화약 접시에 화약을 붓는 등의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사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활의 경우, 익숙해지면 분당 6발 이상, 기계식 노의 경우에도 분당 2발 정도를 발사할 수 있었으나, 화승총은 분당 1발도 발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습기가 심하면 화승의 불이 꺼져 발사할 수 없었으며, 고장이 잦고 오발이 많아서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효 사거리는 100m 정도였지만, 50m에서 사람을 명중시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정확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 즉 유효 사거리는 50m 정도였다. 활의 경우 나라에 따라 다르나 45도 각도로 발사시 최대 사거리는 100m를 간단하게 넘겼으며(영국의 장궁병은 유효 사거리가 230m에 이르렀다.), 노의 경우에는 직선 사격을 해도 유효 사거리가 70m를 넘었던 것과 비교할 때 상당히 효율이 떨어지는 병기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소총은 칼에 비해서 위력이 뒤지는 문제도 있었다. 근접거리에서 그 위력은 절대적이지만, 발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기병대의 돌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량으로 운용하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보완이 되겠지만,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비싼 가격의 소총은 그렇게 다수로 사용할 영주들은 존재치 않았다. (* 총이나 포의 소음은 일단 겪어보면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화약조차 본적이 없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한번 겪어본 후로 대포나 소총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스페인의 침략자에 의해 잉카 등이 멸망한 것은 화포의 위력도 -유럽에서 전해졌다고 잘못 알려진- 여러 질병 때문도 아니며, 단지 그들 자신의 정치적 내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유럽에서도 그리고 동양에서 최초로 총을 도입한 일본에서도 총은 병기로서보다는 사냥, 혹은 암살 목적에서만 운용되었으며 속칭 ‘비겁한 병기’로 불리며 천시되었다.



  당시 동양과 서양에서 군대의 주력은 기병과 창병이었으며(여기에 궁병과 소수의 포병이 추가되었다.) 총병은 별도의 병과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극소수로 운용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총은 전쟁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총이 기존의 활은 갖고 있지 않은 강력한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단점 투성이로 보이는 총의 강력한 이점. 그것은 바로 활에 비해 익숙해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100년 전쟁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장의 주역은 소수의 용병이나 기사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을 주축으로 한 국민군, 그리고 정부군으로 바뀌어 나갔다.

  전장에서 동원되는 군대는 도시 국가 시대처럼 수천, 고작해야 1만에 이르는 게 아니라 많게는 10만, 20만이 동원되기까지 했다.

  왕의 권력은 봉건 시대와는 달리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기에(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의 말이 전해진다.) 국민 동원령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권력에 도전할 영주나 기사들은 이미 가신이나 신사로 바뀌었으며 왕이 모은 군대를 지휘하는 일개 지휘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로 동원한 군대의 효율성이었다. 군대의 병사라는 것은 -훈련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짧은 기간에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이나 창의 훈련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역시 군대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는 장거리 부대. 즉, 궁병의 육성이었다.



  기사의 쇠퇴와 봉건주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편으로 최초의 국민군 개념이 도입되었던- 100년 전쟁 당시 영국은 대규모 장궁병 부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궁술을 장려해야만 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은 안식일(일요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국왕은 칙명을 내려 안식일에 모든 놀이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직 활쏘기 만은 장려함으로서 장래 국민국의 고용에 있어 필요한 준비를 갖춘 것이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크레시나 아젱쿠르(Agincourt)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것은 영국의 궁병 부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은 아니다. 비율적으로 볼 때 영국은 장궁병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숫자로는 프랑스의 궁병과 노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이런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국이 궁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던 반면 프랑스는 그들의 장거리 부대를 중기병과 철갑병의 보조 역할로만 생각했던 점. 여기에 영국 지휘관의 유능함과 프랑스 지휘관(양쪽다 국왕)의 무능함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궁병의 운용에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조준과 사격은 빠르지만 이를 일제 사격 등으로 체계화시키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필요하다.(활은 몸의 힘을 사용해서 당긴 상태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발사하기가 어려운 병기이다. 여기에 사람마다 그 사거리가 달라서 필요한 지점에 필요한 만큼의 공격력을 집중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때문에 궁병은 시간이 흐를수록 -훈련 기간이 짧고 일제 사격과 원하는 지점에 공격력을 집중하기 좋은- 노병으로 바뀌게 된다.

(여담 - 서양의 Crossbow는 흔히 석궁(石弓)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번역되고 있다. 이는 노(弩)라는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에서 번역에 실수가 있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계승하여 석궁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석궁은 새총 같은 것으로 돌을 날리는 무기이므로, 화살을 날리는 crossbow는 노나 노궁, 또는 십자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노는 활(특히 장궁)에 비해서 병사 1명이 차지하는 공간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옆으로 어느 정도 긴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량의 운용에는 역시 어려움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대규모 노병은 진형을 체계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었으며, -특히 방어전의 경우- 활에 비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에서 노의 여러 가지 이점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 보다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공간마저도 좁게 차지하는 장점을 가진 총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총은 초기의 심지 타입 핸드건에서 벗어나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화승총 방식으로 변모되었기에 -불발 등의 문제가 있긴 했어도- 일제 사격 등을 사용하기도 좋았다.

  더욱이, 정확하게 명중시켜야만 되는 노나 활과는 달리 소총의 탄환은 몸의 어디에 상처를 입혀도 전투력을 확실하게 저하시킬 수 있었다.(격전 중에 다리나 팔에 화살이 맞은 채로 싸우는 병사들은 넘쳐나도록 많았으며 발달된 가볍고도 튼튼한 강철제 전신 갑옷은 이 피해조차 줄여주었지만, 소총 탄환에 대해서는 이 갑옷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총신이 길고 공간을 좁게 차지하여 그야말로 대량의 집중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당시 총기의 가장 큰 문제는 오직 하나 ‘너무 비싸다는 점’ 이었지만, 당시 전장의 주력이었던 기병의 구성과 운용비에 비하면 훨씬 저렴했다.)


  그리하여 총기의 여러 가지 이점에 눈독을 들인 지휘관들은 소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서.(정확히는 소규모의 소총병이라고 해도 과거와는 달리 원하는 지역에 집중배치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기병은 더 이상 전장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파이크병과 장궁, 여기에 노병의 등장으로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기사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그리하여 그 유명한 돈키호테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낮은 계급의 아시가루(足軽)에 의해 구성되던 장창병과 소총병이 사무라이의 권위를 박살내고 있었다. (* 창병과 소총병의 공통점은 둘 다 좁은 공간에서 집중 운용이 가능하며, 훈련 기간이 짧고 대량 운용시에 큰 효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병은 아직도 기동성이라는 이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전장에 도착한 뒤에만 쓸모가 있을 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말의 유지를 위한 보급품 수송으로 도리어 지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일부 평야를 제외할 경우 기병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편하고 습한 기후에도 사용할 수 있는 부싯돌 식 점화 장치가 등장하고, 여기에 총 끝에 끼우는 총검이 추가됨으로서 창병조차 의례 행사 속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전투는 더 이상, 경험이 많은 용병이나 일기당천의 맹장에 의해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징집된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서 실시되었다.


  불과 한달 이하의 훈련으로도 수년간 훈련받은 기사 수준의 파괴력과 수개월 이상 훈련받은 궁병 수준의 정확성을 가지고, 창병처럼 좁은 곳에서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소총병이 전장의 주력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19세기에 이르러 전쟁의 병과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바로 소총병과 포병으로...(구 시대의 유물인 기병은 그 기동성과 돌격력을 인정받아 2차대전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소형의 권총이나 장총 등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으며 고전적 의미의 기병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소총과 대포 시대의 지휘관에겐, 더 이상 용맹함이라는 덕목은 필요치 않았다.(아니 도리어 개인적으로는 용맹을 버리고 뒤에 설 필요가 있었다.) 시대는 용맹하기 이를데 없는 술트나 뮈라 같은 지휘관보다, 단신에 수학 성적이 우수한 나폴레옹 같은 지휘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우나 여포 같은 맹장이 아니라, 제갈량 같은 문약한 선비가 최일선에서 지휘를 맡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소총과 대포는 병사 개개인에게 들어가는 시간과 돈을 줄여주고, 그 결과 국민군에 이어 정부군의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규모라고 해도 거의 수천 단위에 이르는 부대의 격전에서 ‘일당백’의 전설적인 영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병사 개개인보다는 부대 하나하나가 중시되고 단체가 중시되는 체계로 바뀌게 되었다.



  소총과 대포. 그것은 물론 기존에 비해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힘을 가진 병기이다. 그러나, 그 전술적 의의는 단순히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힘」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 기존의 권위를 완전히 부셔버리는 혁명적인 역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볼 때 전장은 튼튼한 체격과 강한 힘, 그리고 용기를 가진 전사들의 무대였다. 항우나 여포 같은 장수들이 활약할 때 평범한 농민군은 나설 자리가 없었으며, 화려한 갑주를 갖춘 기사들이 질주할 때 초라한 몰골의 농노들은 뒤에서 응원하는 역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긍지나 자긍심 따위는 눈 씻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전장의 주역이 아니었으며, 앞에 나서는 입장도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그러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500 의군이 -관우, 장비, 유비의 맹활약에 힘입어- 5만 황건적을 물리치는 업적을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전투에서 병사들은 전장의 주역이 되지 못한다. 아니, 어떤 점에서 하나의 말 역할도 하지 못한다.



  기사나 귀족, 사무라이 등은 농노나 농민, 혹은 시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푸른 피」를 타고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과 달리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고 말타는 훈련을 해 온 그들을, 그리고 고가의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을 「붉은 피」의 대중이 따라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영국의 장궁병의 경우처럼, 궁병으로서 활약하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에드워드 시대 영국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이 「푸른 피」를 이길만한 훈련을 할 시간은 없었다.


  한 명의 기사가 현대의 전투기 수준의 유지비를 소모하고, 탱크 수준의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평등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궁병에서 시작된 일반인 군대의 활약은 소총과 대포에 이르러 그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푸른 피」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국민군과 정부군은 더 이상 귀족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뽑은(혹은 여러 과정을 거쳐 선발된) 지휘관이 지휘하였고, 전장의 주역은 더 이상 기사도 사무라이도 아닌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소총이나 대포만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소총과 대포는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푸른 피」의 몰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민주정의 탄생에 큰 힘을 안겨다 주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푸른 피」만이 그 주역을 차지할 때 진정한 민주정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귀족과 무사들이, 그리고 소규모 용병들 만이 전투에 나설 때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심은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소총과 대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에 있던 민중에게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다. 전투기 수준의 유지비를 필요로 하는 기병이, 그리고 수대에 걸쳐 명성을 쌓아온 사무라이가 며칠 훈련도 하지 못하고 갑옷조차 변변치 못한 소총병에 의해 쓰러지는 순간, 역사는 변화하게 된 것이다.


  소총과 대포는 전장의 혁신을 가져온 주인공으로 기억될 수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전장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분명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물론 소총이 플라즈마를 발사하고 대포가 이온 탄환을 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총과 대포가 전장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이상, 모든 이들은 그 자신이 이 세계를 수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푸른 피」 만이 힘을 가지는 시대가 아니므로...



(* 참고 - 국민군과 정부군은 비슷한 개념이지만, 한편으로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나 자신의 민족을 바탕으로 한, 다시 말해 지역적인 개념인 방면, 후자는 정치 체계에 바탕을 둔 개념인 것이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들이 모였다면 모두 국민군이라 할 수 있지만(넓은 의미에선 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국민군에 속한다.), 정부군은 국가의 지도 체계인 정부에서 필요에 따라서 국민들을 모으고 지휘하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p.s) 판타지 세계에서 마법병의 활용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 일이 있습니다. 판타지 세계에서 강력한 마법사들은 대포에 필적할만한 효과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훈련 만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대포와는 달리 마법사의 훈련에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들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혼자서 성을 무너뜨리는 위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공성 병기보다도 큰 위력은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총이나 대포는 그 위력보다는 대중이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강점을 가지는 병기이니까요.



- 참고 - 


* 파이크맨(Pikeman) - 많은 이들이 파이크맨(Pikeman)을 창병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파이크(Pike)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Spear)과는 완전히 다른 무기이다.

  판타지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창은 개인이 쓰기 좋도록 대개는 자기 키 정도(보통 1.5m) 길이에 지나지 않는 무기이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자랑 거리인 팔랑크스(Phalanx)의 장창을 닮은 파이크는 최소한 5m, 길게는 6m에 이르는 튼튼한 막대에 창날이 달린 것으로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병기라고 할 수 있다.

  들고 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파이크는 개인이 홀로 사용할 수 있는 병기는 아니다. 이는 여러 명의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전투를 벌일 때나 쓰일 수 있는 무기로서 대규모로 운용될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파이크를 앞으로 내밀어 고슴도치 상태가 된 파이크 병은 중기병의 돌격조차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세 기사들의 시대에 종막을 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화포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장궁(Longbow) - 미국이 자랑하는 대전차 헬기의 개량형을 부르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이 병기는, 100년 전쟁 시대 영국군의 주력 병기로서 활용되었다.

  대략 1.8~2m 길이에 이르는 장궁은 통상적인 활에 비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유효 사거리가 230m에 이르는 이 병기는 보관이나 관리, 유지 등이 불편하긴 하였으나 기존의 활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유효 사거리로 먼 거리에서부터 공격이 가능했고, 기사들의 철갑을 간단히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길이가 길고 탄력이 강하여 사용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영국에서는 일찍이 활쏘기를 적극 장려함으로서 대규모 장궁병 부대를 양성할 수 있었고, 주로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던 이 병사들은 귀족이나 영주와는 달리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며 전장을 주름잡았다.

  개전 초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이들은 후일 프랑스에서 국민병을 동원하고 화포를 본격적으로 투입함으로서, -그리고 영국의 정치가 불안해지면서- 차츰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역사 이야기 2014.02.02 15:32

  교과서를 보면 수많은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 중 상당 수는 결과적으로 같은 뜻이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원정'과 '침공'이지요.(또는 ‘정벌(정복)’과 ‘침략’)


  각각의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정 : 먼 곳으로 싸우러 감


침공 : 다른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 공격함


  이렇게 보면 분명히 다른 뜻이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합니다.


  예제를 살펴보죠.


‘나폴레옹은 러시아로의 원정에 실패하면서 몰락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로의 침공에 실패하면서 몰락하였다.’





  결국 두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은 다르죠.


  원정이라고 하면 왠지 ‘우리 편’ 같은 느낌이 돌고, 침공이라고 하면 왠지 ‘남의 편’이라는 느낌이 드는...


  결국 이 용어에서는 ‘내편, 니편’을 가르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차이는 ‘침공’이나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광개토대왕의 북방 원정(정벌)’

‘광개토대왕의 북방 침공(침략)’


  용어만 바꾸었을 뿐인데 참으로 느낌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광개토대왕이 왜 침공했냐? 거기 우리 땅이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바꾸어 보죠.


‘스페인의 잉카 원정’

‘스페인의 잉카 침공’


  아무리 보아도 두 번째는 스페인이 나쁜 놈 같습니다. 앞의 것은 뭔가 개척정신이 느껴지고....


  우스운 말이죠. 스페인의 행동이 ‘원정’이건 ‘침공’이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민폐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거기에 아무도 없었고(이를테면 원주민 조차 살지 않았고) 말 그대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것이라면 모를까, 거기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결과 그들이 좋아졌건 나빠졌건 그건 ‘침략’이 아닙니까?


  광개토대왕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습니까?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히는 과정은 분명히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는 당연히 피해자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봐야 그들에게 있어서는 광개토대왕은 ‘침략자’ 이상의 그 무엇도 되지 못합니다.


  ‘침공 결과 더 좋아지지 않냐?’라는 의문을 던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를테면 카이사르의 로마가 갈리아를 ‘침공’하여 갈리아 사람들의 삶이 좋아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로마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리아인들이 죽고 상처입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래도 당신 자손들은 더 행복하지 않겠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자손조차 모두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원정과 정벌이라는 표현은 이 같은 피해자의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며 잊어버리게 만드는 최면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보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지요. 나아가 




  침략과 침공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드는 전쟁 행위입니다. 그것을 ‘원정’이나 ‘정벌’, 또는 ‘정복’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은 승자의 변명일 뿐이며, 승자를 칭송하고 동일시키려는 잘못된 인식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눈 앞에 역사 책이 있다면 원정이나 정벌, 정복이라는 말 대신에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말을 넣어서 다시 읽어보세요. 아마도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역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를 배우고,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담) 사실 이런 말은 한자말로만 있는게 아닙니다. 영어에도 Conquer(정복)과 Invade(침략)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자신들의 조상에게는 Conquer를, 남의 조상에게는 Invade를 쓰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진을 보며 우리는 '정복자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기도 하겠지만, 저 뒤에는 죽어가는 수많은 장병들이, 그 앞에도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폴레옹은 훌륭한(?) 침략자인 것입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역사 이야기 2012.01.06 11:47

장애 (명사)

1) 어떤 일의 성립, 진행에 거치적거려 방해하거나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함.
2)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두 개의 뜻은 다르지만, 한편으로 이는 같은 의미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신체나 정신의 장애라는 것은 사회 생활을 하고 꿈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장애인에게 차별이 있거나,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2번의 뜻은 1번의 뜻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을 갖기도 합니다. 사실상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의 오늘(1852년 1월 6일) 프랑스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는 건강했던 그는 3살 때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쳐 멀었고, 오른쪽 눈도 감염으로 4살이 되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 즉,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시각장애인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것 말고 이렇다 할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두 번의 행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행운은 그의 가족이 그를 스스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원했다는 점입니다. 부모의 지원으로 그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마을의 카톨릭 신부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직접 하도록 가르치고 도와주었지요.

두 번째 행운은 그가 파리의 왕립 시각 장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돈은 풍족한 정도가 아니었기에 그는 빵과 물로만 연명해야 했지만, 그가 구걸에 나설 필요가 없도록 해 주었고, 학교를 마친 뒤에는 그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얻어 학생들에게 기초적 기술과 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존경 받는 선생님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교사 생활 중 또 다른 두 번의 기회(다른 이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새로운 결과를 거둡니다. 바로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쓰기도 가능하고 글자만이 아니라 문장 기호, 그리고 수학 기호나 음계도 표현할 수 있는 알파벳 점자 체제를 창안한 것이지요.

43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은 시각 장애인, 루이 브라유가 창안한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 체계는 비록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점차 그 유용성이 인정받아 세계에 퍼져나갔고 지금도 세계에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 점자 체제에 그의 이름을 붙여 “브라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브라유가 만들어낸 점자 체계. 영어권에선 이를 브라유라 부른다.


갑작스러운 장애로 어려움을 겪게 된 브라유가 존경받는 교사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불편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점자 체제를 고안하여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요?

우선은 무엇보다도 그가 장애라는 고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이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그에게 여러 행운이, 정확히 말하면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의 가족이, 그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기보다는 그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 반면, 집에서는 모든 일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기초적인 학문을 익힐 수 있었고, 구걸 대신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노력을 갖게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에 왕립 시각 장애 학교가 존재했으며, 그가 장학금을 받아서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만일 왕립 시각 장애 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그를 장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루이 브라유는 학문을 계속할 수 없었고 점자 기술을 배워서 이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세계의 시각 장애인들은 읽기 밖에 할 수 없는 불편한 점자 체제, 또는 손을 여러 번 움직여야 읽을 수 있는 점자 체제에 의존하며 어렵게 소통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 브라유의 점자가 탄생하여 세계의 시각 장애인들이 혜택을 보게 된 것은 160년 전의 파리에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존재했으며, 그들에 대한 장학금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장애인이라도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장학금 복지 체제… 다시 말해 사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루이 브라유는 훌륭한 교사로서 존경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몸이 좋지 않아 안마를 받으며 시각 장애인 안마사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현재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육학을 배우고 있다고 하시는데, 장래에는 유네스코(국제 연합 교육, 과학 기구)에서 일을 하면서 장애인과 무슬림을 위한 교육에 평생을 바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 할 때는 단순히 ‘대단한 마음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루이 브라유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니 그 분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더군요. 과연 160년 전의 프랑스에 비해 2012년의 대한민국은 얼마나 나은 것일까라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시각 장애인들에게 열린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안마사 직업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디지털 시대, 스마트 시대라고 하지만, 국내의 스마트폰 상당 수는 시각 장애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무용지물이 되고 있지요.

  점자 도서관은 몇 군데 되지 않으며 그나마 책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전자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현실이지만, 음성 지원 등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별로 없어 역시 도움이 안 되고요.

제가 이야기했던 안마사 분은 그나마 저희 회사의 안마사로 채용되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꿈이 ‘안마사’인 현실이 계속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녹음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방송통신대학원을 통해서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요? 하지만, 방송통신 대학교 이외의 문이 그다지 열려있지 않다는 현실은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것은 1차적으로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사회에서 이를 지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160년 전에 태어난 한 사람이 사회의 작은 도움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수많은 ‘미래의 루이 브라유’가 더욱 많은 기회를 얻고 더욱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역사 이야기 2011.05.31 11:45
총과 버터 - 역사의 전쟁
(Gun & Butter - War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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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 오논 강 상류에 세워진 거대한 제단에 한 사람의 사내가 하늘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강인한 눈길의 그 청년... 아흔 아홉의 계단 아래 펼쳐진 평원, 일제히 나열한 십만의 정병을 바라보며 그는 횃불을 들어 올렸다.

  "징기스칸!"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서 시작된 파문은 어느새 십만의 환성으로 이어졌다.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소리의 물결... 그것은 방대한 몽골 초원을 넘어 무한히 퍼져 나갔다. 그들이 정복한 세계...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손에 넣을 광활한 세계를 향하여...


  그렇게 시작된 정복의 꿈. 역사상 가장 넓고도 강대했던 제국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때 수없이 많은 부족으로 갈라져 대결하던 초원의 전사들... 그들이 외치는 하나의 함성과 더불어...

[ 제단 위에서 그는 전 몽골의 칸으로 군림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 대몽골 제국. 역사상 그 누구도 이만한 제국을 세우지 못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푸른 늑대, 그 위대한 탄생
(* 흔히들 몽골을 한자로 몽고(蒙古)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낡고 잘못된 표현이며, 중국에서 몽골을 낮추어 부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몽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전설 (원조비사 / Copyright © Koei All rights reserved ) ]

  방대한 유아시아 대륙의 북동쪽, 한족들이 자부심을 갖고 중원(中原)이라 부르는 영토를 지나 죽음의 세계 고비 사막을 넘어서면 세계의 끝까지 펼쳐진 드넓은 초원이 그들을 맞이한다.

  황량한 대지와 낮은 구릉. 사시사철 메마른 바람만이 부는 가운데 기대할 것이라고는 밤하늘의 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곳에서도 사람들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소와 말, 양과 염소 만을 벗 삼아, 바람가는 대로, 그리고 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던 이들... 어느 한 곳에 머무르는 일 없이 끝없는 초원 위를 떠도는 사람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몽골이라 불렀다.

[ 몽골인.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유목민에 지나지 않았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800년 전, 그들은 다 합쳐봐야 200만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각기 수많은 이름으로 나뉜 채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며 살아왔다. 소와 양에서부터 재물, 심지어 신부마저도 마음대로 빼앗으면서...

  문자조차 없이 그야말로 유목이라는 생활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에게도 전설, 그리고 신화는 존재하고 있었다. 푸른 늑대와 흰 사슴... 바로 몽골인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한 두 신성한 존재의 이야기를...

  하지만, 12세기 당시, 그들은 불운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동족끼리... 그들은 싸움을 벌여야 했고 그렇게 해서까지 얻은 얼마 안 되는 땅과 재물은 당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여진족의 금(金)... 그리고 그들에게 몰려 몽골로 들어온 잘래어 족에게 빼앗겨야 했다.

  게다가, 금의 책략으로 벌어진 타타르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서 더욱 큰 재앙이 밀려오고 말았다. 한때 초원을 질주하던 그들은 이제 말을 버리고 숨었고 들판을 기어 다니며 들쥐를 잡아먹고 썩은 고기를 주워 먹어야 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형제를 내버리고 자식들을 팔아버리는 현실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들의 삶은 점차 고달픈 것으로 변해갔다.

[ 당초엔 불길하다 생각된 아이의 탄생에는 패자의 운명이 점쳐져 있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보르지긴 테무진... 후일 징기스칸이라는 이름 아래 위대한 제국을 수립한 그 사람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다. 후일 위대한 이름을 얻게 되는 그곳, 몽골을 가로지르는 오논 강의 상류에서.

  사로잡은 타타르인 적장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오른손에 핏덩이를 쥐고 태어난 그 아이에겐 세계의 지배자가 되리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엔 그 누구도 이런 예언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다. 테무진이 태어나던 1167년, 여름이 시작되는 당시 몽골족은 그 수많은 종족 중에서 가장 수가 적고 또한 약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축복과 더불어 태어난 소년, 테무진은 초원의 아이들이 그렇듯 또래 아이들과 더불어 초원을 달리며 세계를 배웠고, 자연을 통해 영혼과 육체를 키워나갔다. 강인한 전사인 예스게이. 그리고 현명한 정신을 가진 외삼촌 마메이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그는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훌륭한 소년으로...


늑대의 첫 발걸음

[ 아버지인 예수게이의 사망. 이 사건으로 테무진의 운명은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늑대는 아직 어렸고 주변은 너무도 험난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가장으로서 독립하게 된 것은 그 만이 아니라 몽골족에 있어서도 불운한 일이었다.

  그것은 부친 예스게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폭풍을 만나 헤매던 중 우연히 타타르인의 천막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 그는 길을 잃거나 굶주린 손님은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돕는다는 초원의 규율을 어긴 주인에 의해 독을 먹고 만 것이다. 어렵게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그였지만, 몸에 퍼진 독을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안다의 맹세. 그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고귀한 형제의 맹세였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당시 테무진의 나이는 열 살.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가장으로서 독립한 그 앞에는 너무도 힘든 상황이 펼쳐졌다. 아직 한 가족조차 보호할 수 없는 그를 몽골족 만 오천 가구가 주인으로 받아들일 리는 없었고 어린 그에게 공손할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갖고 가장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자라난 친구, 그리고 지금은 안다의 맹세를 통해 초원의 의형제라는 인연을 맺은 자무카의 격려를 통해서...

  두려움을 느낀 부족들이 보호를 바라며 떠나버리고 반란으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자격까지 빼앗긴 상태에서도 테무진은 굴하지 않았다. 가장으로 그는 집안의 질서를 지키고자 했고 무엇보다 예스게이의 후계자로서 당당한 자세를 지켜야만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에게 도전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사냥감에 멋대로 손을 대기도 하는 배다른 형제, 벡터를 쏘아 죽여야만 했고, 이를 빌미로 그를 암살하려던 자들과 대결해야만 했다.

[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규율을 지키고자, 그는 이복 동생을 죽이고 만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가난뱅이들이나 손을 대는 들쥐나 마못을 잡아먹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강철 같은 사나이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위기 속에서 그는 동지를 만날 수 있었고, 오랜 약혼녀 보르테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등 부족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만에 만난 보르테는 아름다웠고, 예물로 가져온 검은 담비털은 더 없이 탐스러웠다. 테무진은 양 1000마리 값어치에 달한다는 그 털가죽을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토그룰 칸의 환심을 샀다. 힘과 지혜를 입증하여 호감을 얻은 테무진은 토그룰 칸을 양부로 모셨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서 테무진은 오랜 형제, 자무카와 재회하였다.

  어릴 때 함께 초원을 달렸고, 안다의 약속을 나누었던 자무카. 토그룰 칸의 도움으로 자다라트족의 족장 자리를 되찾게 된 그와의 재회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쁨 이상의 가능성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바람, 그리고 우정의 종말

  그렇게 테무진은 가능성을 얻게 되었지만, 동료들을 더하여 고작 5채의 집에 불과했던 그의 힘은 미약한 것이었다. 때문에 오랜 원한을 갚기 위해 밀려온 메르키드족의 습격자들 앞에서 그는 아내인 보르테의 손을 놓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단 두 명의 부하와 아홉 필의 말. 테무진에게는 그것 밖에 없었지만, 복수의 일념은 그의 행보를 더욱 빠르게 했다. 6개월에 걸쳐 2천 5백의 병사를 규합한 그는 양부인 토그룰 칸, 그리고 안다 자무카의 군대와 합류하여 전진했다. 아내를 구하고 명예를 되찾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 테무진과 자무카, 그리고 토그룰 칸은 말머리를 함께 하고 메르키드족을 공격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 토그룰 칸, 그리고 자무카에게 있어 그 전쟁은 사실 테무진과의 의리보다는 메르키드라는 기름진 먹이를 노릴 수 있는 기회였다. 테무진의 상황은 바로 이를 위한 명분을 제공해 주었으며, 특히 오래전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어머니를 첩으로 빼앗기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던 자무카는 개인적인 원한도 더하여 더욱 기세등등했다.)

  "돌진하라!"

  테무진의 신호와 함께 그의 부대는 상류의 산악 지역을 지나 적의 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메르키드족이 혼란에 빠진 사이, 자무카와 토그룰 칸의 대군이 강을 넘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많은 천막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메르키드 족은 처참하게 패배했고, 수많은 피난민들의 소음 속에서 테무진은 그의 사랑하는 여인, 보르테를 구출해 내었다.

  테무진, 그리고 자무카에 있어 진정한 대승으로 손에 넣은 영광,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재물과 노예는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며, 그것이 우정의 결과라는 것은 그들을 더욱 기쁘게 해 주었다. 두 번째 안다의 맹세, 그리고 그 후 함께 했던 시간은 그들의 우정을 더욱 굳게 만들어 주었다. 하나의 마음... 그것이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 미소짓는 두 사람, 그러나, 둘 사이의 골은 점차 깊어져만 갔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그들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 줄 지를...


동에서 서까지, 무한한 가능성을 향하여...

  그것은, 메르키드족 포로 처리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나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막지 않으며, 또한 나를 떠나는 모든 사람을 막지 않는다."

  아버지 예스게니가 그러했듯, 테무진은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하나의 부족이라 생각하는 그는, 한때 적이었던 이들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었다. 작은 재물에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느 것 하나 아낌없이 그리고 공평하게 분배하고자 노력했다. 재산이나 가축, 땅, 그리고 여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유를...

[ 테무진군. 이렇게 다채로운 깃발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군대는 많은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그에게는 적도 아군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적이었던 존재와 아군이 있을 뿐. 날카로운 지혜로 그는 부하들의 공적과 과오를 정확하게 판단했고 상벌을 명확하게 했다.

  부하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심지어 자신의 말조차 마음대로 타도록 내어주는 그에게 있어 전통이라는 것은 관계가 없었다. 혈통도, 부족도, 그리고 신분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탁월한 지도자였던 자무카. 그는 전통에 집착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자무카는 달랐다. 자다라트 부족 족장의 아들, 다시 말해 높은 출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항상 인식하고 있던 그는, 귀족과 노예가 존재하지 않고 부족도 존재하지 않는 몽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패권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질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부족을 강대하게 키우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전체의 칸(카칸)에 오르는 것이기에...

  무엇보다 그는 중원을 지배하는 금의 강대한 힘을 알고 있었다. 60만 대군이 군림하는 그 세계의 힘을. 몽고의 독립을, 그리고 통일을 바라지 않는 주변 세력의 위협을... 강자로서 자무카는 권력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끝없는 전쟁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면 자연적으로 따를 것이다."

  이러한 테무진의 생각은 자무카에게 있어 이단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정으로서, 그들은 선의의 경쟁을 약속했지만,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진 두 사람의 결별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둘의 동반 관계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계급에 따라 막사를 짓도록 하자는 자무카의 제안에 대해 테무진이 그와 함께 야영하기를 포기하고 행군을 계속하면서.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자무카의 부하였던 이들이 따름으로서 두 사람의 결별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주변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테무진의 세력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몇 달 전 만 해도 다섯 채에 불과했던 영토에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고 수년에 걸쳐 그것은 5만 가구로 성장했다. 테무진의 키야트몽골족을 중심으로 몰려든 13개 부족. 그들은 테무진을 자신들의 칸, 테무진 칸으로 선출했다.

  만장일치의 민주적 방식에 의해 선출되는 칸,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대표에 불과했다. 권력은 거의 없으며, 독립성이 강한 부족들은 항상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형태에 만족할 수 없었던 테무진은 절대적인 군주제를 위하여 보다 명확하고 확고한 체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것은 형태나마 지켜지고 있던 자무카와의 우정을 완전히 깨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내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테무진이 자신과 결별을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휘하에 있던 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간 것에 분노한 그는 테무진의 칸 선언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테무진의 양부인 토그롤 칸이 테무진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자무카는 테무진을 제거하겠다는 마음을 잠시 감출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를 공격할 명분이 생기리라 생각하면서...


달란 발주트, 그 처참한 결별의 현장

[ 그것은 칭기스칸의 최악의 패전이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그것은 초원에서 흔한 말도둑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테무진의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사아리 대초원에서 발생한 그 사건은 추적자들의 화살에 맞은 말 도둑의 사망으로 간단히 종료되는 듯 했지만, 바로 그 말 도둑이 자무카의 이종사촌동생으로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당시 그가 비무장 상태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살인자를 양도하라."

  자무카의 요구는 지극히 간단했지만 그것은 결코 테무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기도 했다. 칸으로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자무카가 바라고 있던 전쟁을 위한 구실이기도 했다.

  안다의 맹세는 깨어지고 둘은 군대를 이끌고 맞섰다. 몽골 고원 중심부의 달란 발주트에서 양 쪽을 합쳐 6만에 이르는 대군이 정면으로 격돌한 것이다. 아침에서 시작하여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는 격전, 그 격한 대결에서 보다 우수한 장비와 병력을 이끌고 있던 자무카는 시종일관 테무진의 군대를 압도하였고 저녁 무렵에는 그의 군대를 거의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방의 활로가 막힌 상태에서 테무진은 험준한 산맥을 뚫고 겨우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태양처럼 솟아오르던 테무진, 그의 처참한 패전이 결정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은 테무진에 대한 자무카의 복수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 삶아죽이기... 이것이야 말로 몽골 최악의 잔혹한 처벌이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산더미 같은 전리품을 수레에 쌓은 그는, 테무진의 포로 대부분의 목을 잘라 버렸고, 그 중 고급 장교들은 산채로 삶아 죽였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피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몽골인에게 있어 혼백마저도 죽여 버리는 가장 처참하고도 끔찍한 처벌이었다.

  이제껏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잔혹한 처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결의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제 없이 자라났기에 인간의 정을 그리워하기도 했던 자무카, 테무진에게 분노하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설득하고자 했던 그인 만큼, 이렇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통해 의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뛰어난 지도자였던 그의 단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혈통이라는 전통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테무진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겁을 먹지도 않았고 자무카를 증오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실책을 괴로워하며 "다시는 패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뿐...


  달란 발주트. 그 처참한 전쟁의 결과는 테무진의 성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말았다. 그의 세력은 자무카가 무시할 정도로(아니 달란 발주트에서 최후의 진격을 포기했듯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모든 이들이 테무진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믿고 있었듯이 그에게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패전 이후에도 변함없는 공정함과 정치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기를 통해 그는 사람들을 포섭하였고 그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 강대해져 갔다.
  적의 내분이나 자무카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서 더욱 강대한 세력을 키우는데 성공한 그는 왕칸으로 추대된 토그톨 칸과 함께 몽골 초원 제압에 나섰다. 타타르를 밀어내고 쥬치족을 장악하는가 하면 타이추트 족을 무너뜨리는 그의 거듭된 행보에 몽골의 수많은 부족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안다, 자무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란 발주트에서의 완승 때문인지, 테무진의 재기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던 그이지만 근처의 타이추트족이 멸망한 사실은 테무진에 대한 자무카의 위기감을 높여주었다. 자무카는 타이추트 족의 생존자를 포섭하면서 반 테무진-왕칸 세력을 집결시켰다.

  "여진족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은 배신자." 왕칸과 테무진에 대한 증오심은 자무카를 중심으로 부족들을 뭉치게 했다.

  그리하여, 몽골 고원에서 이제껏 볼 수 없는 대 병력이 집결한 가운데, 그들의 대표자인 자무카는 구르 칸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부족들이 자발적으로 떠받드는 위대한 자... 자무카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개혁과 전통... 대제국을 향하여...

  이렇게 자무카를 중심으로 한 대동맹군이 결성되는 순간, 본거지인 규렐큐 산하의 초원 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테무진은 한 사내를 맞이하고 있었다. 동맹군에 속한 부족 출신 사내, 그는 테무진이 심어둔 첩자였다. 과거의 경험, 특히 달란 발주트에서의 패전을 바탕으로 첩보의 중요성을 깨달은 테무진은 몽골리아의 주요 부족에 첩자를 심어두었고 이를 통해 그는 자무카의 움직임을 거의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5만이 넘는 대군. 그것은 몽골에 인간이 살아간 이래 최대 규모의 병력이었고 이제껏 테무진이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 강대한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를 지휘하는 것은 테무진 자신조차 참패했던 경험이 있는 탁월한 지휘관, 자무카였다.

  왕칸의 군을 포함하여 4만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테무진. 그는 이 일생일대의 결전을 맞아 무엇보다도 신속한 기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목표는 코이텐 지역에 위치한 세 봉우리. 이를 얻기 위해 그는 알탄, 다리타이, 쿠차르에게 각각 2천의 병사를 주고 선발대로 진격하도록 명했다. 그들의 목적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아군의 주력 부대를 맞이하는 것.

  바람을 가르는 듯한 행군으로 그들은 세 봉우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들 앞에 아추, 쿠투 등이 이끄는 자무카의 선봉이 다가오고 있었다.

[ 테무진의 군은 바람처럼 진격해 나갔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적과 맞서지 말 것." 이것이 테무진의 명령이었지만, 그대로 두면 적의 선봉이 자신들에게 공세를 가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밤이 다가온다는 것을 이용하여 크게 함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자무카의 선봉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적과 대면하게 된 것을 우려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바로 그 순간 코이텐 전투의 승리는 왕칸-테무진 동맹 진영에 들어가고 말았다.

  더 많은 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빨리 이동할 필요가 있었지만, 자무카는 신속한 기동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눌러 앉고 말았다.
   그로부터 고지를 빼앗기 위해 거의 한달 간에 걸친 소규모 격전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손해를 보는 건 자무카 진영이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테무진 진영에서 여유 있게 대처하는 상황에서 낮은 곳의 자무카군은 결사적으로 봉우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무너져야 했다. 그렇게 한 달 여의 대결 끝에 결전은 전개되었지만, 분열되고 지친데다 식량도 떨어져가는 자무카의 군세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왕칸의 우둔한 아들이었던 상쿤은 자무카의 계책에 말려들고 만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하지만, 탁월한 지도자이자 외교적 술책을 갖고 있는 자무카는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테무진의 성공을 의심하는 왕칸의 아들, 상쿤을 꼬드겨 왕칸과 테무진이 갈라서게 만들었고 이를 이용하여 한때 테무진을 무너뜨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테무진은 단순히 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비관하지 않고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으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강한 군대 만은 아니었다. 과거의 패배가 군대의 질적 차이에서 나왔다고 생각한 그는 무조건 격렬하게 싸우는 야만족의 전사로서가 아니라 거대한 군대로서의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몽골의 군세. 그것은 로마 군단 이후 최초로 등장한 근대적이고 지극히 효율적인 전투 집단이였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체계화된 훈련, 그리고 실적과 실력에 근거한 확고한 계급 체제, 그리고 명확한 군율에 의해 구성되는 그의 군은 이제 더 이상 오합지졸의 떼거리 전사가 아니었다. 바로 훗날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 몽골 기병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동방 최초의 근대적인 군대였다. 만-천-백으로 내려오는 조직 구성은 현대식 부대 체계를 연상케 하고, 충실한 보급 체제와 장비,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에 의해 구성되는 그들은 로마 군대가 사라진 이래 최초로 등장하는 근대식 군대였다.


자무카, 그 최후의 전장

  왕칸과 상쿤이 쓰러지고, 테무진 칸의 위세는 계속되었다. 그에 맞서기 위해 자무카는 남은 세력들을 모두 집결시키는 한편, 강대한 나이만족과 손을 잡고 일어선다. 나이만 하나 만으로도 5만에 이르는 대군. 여기에 남은 부족들을 합쳐 7,8만에 이르는 군사가 불과 2만에 지나지 않는 테무진의 군세를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적이 훨씬 많은데다 자신들은 지쳐있고 말도 쇠약해졌다는 것을 아는 테무진이 그들을 기만하는 전술을 세운 것이다.

  어느날 밤, 테무진 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아리 대초원이 불길에 휩싸인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적어도 산정에서 내려다 보는 나이만의 첩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하늘의 별보다 많은 횃불... 허상에 불과한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수가 하늘의 별보다 많습니다."

  그 보고는 수적으로 우세한 나이만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그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이 사실 한 사람당 5개씩 들도록 한, 거짓 횃불... 그리고 허수아비 병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나이만군은 나가서 싸우기 보다 유인 계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 질서 정연하게 나아가는 몽골군. 바로 이것이 그들의 전설이 시작됨을 알리는 행군이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그렇게 테무진군은 불과 2만도 안 되는 군세로 나이만의 영토 깊숙이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제서야 나이만은 테무진군이 자신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속은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테무진은 군을 불러 보았다.

  "하나의 부족은 하나의 화살처럼 쉽게 부러지지만, 많은 부족들이 합치면 절대로 부러질 수 없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화살의 예를 들어 그는 병사들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 대군을 이끌고 최후의 결전에 기대한 자무카. 그러나, 테무진의 군세는 그 이상의 힘을 보여주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오늘은 운명의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테무진의 진격 명령과 더불어 2만의 병사들은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적으로 부족한 아군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밀집 대형으로 전진을 개시했고 이윽고 질서 정연하게 산개하며 적의 허점을 노리고 파고 들었다.


  테무진의 명령 하나하나에 따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았다. 하나하나의 전사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 군대로 움직이는 테무진군. 그들은 쐐기처럼 적진을 파고들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격렬한 접전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테무진의 군세 하나가 방향을 틀어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나이만군은 기세를 타고 추격을 시작했지만, 함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 추적하던 자무카의 군세는 복병에 말려들고 말았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그리고 그것은 팽팽하던 상황을 완벽하게 뒤집기에 충분한 일격이기도 했다. 무너지는 군세 속에서 자무카는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쳤다.


징기스칸 그 위대한 전설의 시작

  그렇게 몽골의 마지막 군세는 흐트러졌지만, 전쟁을 종결되지 않았다. 나이만과 메르키드의 잔당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력하기 이를데없는 그 공세는 순식간에 평정되었고 테무진의 적의 최후를 보기 위해 잔적 소탕을 명령했다.

[ 두사람의 재회. 자무카는 전사로서의 운명을 택한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해가 바뀌고 테무진의 눈앞에 한 사람의 사내가 끌려왔다. 바로 부하에게 끌려오는 자무카의 쓸쓸한 모습이었다. 주인을 배신한 부하에게 테무진은 처형이라는 상을 내리고 한때 안다였던 이를 일으켜 세웠다.

  "자무카, 나의 오랜 친구여."

  테무진은 다시 자신과 함께 할 것을 부탁했지만, 자무카는 그것을 거절했다. 단지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허락해 달라는 말만을 남기며...


  "나의 영혼은 초원 위를 감돌며 자네와 후손들이 번영하기를 기도하겠네."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 칭기스칸. 그의 여정은 끝이 없었고, 금나라 수도의 성채조차 그에겐 작은 장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자무카의 죽음으로부터 얼마후 테무진은 새로운 칭호를 얻었다. 징기스칸.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오직 하나 뿐인 몽골의 지배자로서... 그와 더불어 그의 개혁, 그리고 정복의 역사는 계속 되었다. 금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공략하고, 서하를 쓸어버리고 페르시아마저 짓밟으며...

  그리고 그는 이루었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제국을... 몽골족 하나 만이 아니라, 몽골에 사는 모든 부족들... 그리고 더욱 많은 이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세계를...


  그것은, 전통적인 혈연과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적인 발상을 통해서 나온 꿈이며, 자무카로 대표되는 전통 세력과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서 얻어진 운명이기도 했다. 자무카와 테무진. 두 사람은 능력 면에서 비교될만한 인재였고 라이벌로서 대결을 펼쳤지만, 결국 테무진의 승리로 종결되고 만 것이다.

  테무진, 그는 달란 발주트에서의 처참한 패배를 자신의 힘으로 딛고 일어서 스스로의 발로 걸음을 걸었다. 역경 속에서 그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을 실시하며 맞서 나갔다.

[ 의료부대를 창설하는 등, 그의 개혁은 끝이 없었다. Copyright © history channel All rights reserved ]

  자무카는 그렇지 못했다. 신분과 혈통, 전통... 그리고 정에 얽매인 그는 기회를 기회로서 살리지 못했고, 패배를 거름으로 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무카가 구세대고, 징기스칸이 신세대이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징기스칸이 단순한 야만족이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정치, 군사적 천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무카가 뛰어났던 만큼 더욱...)


  그는 단순히 군 지휘관으로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가능성을 낳을만한 역량, 그리고 탁월한 이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역량이 친형제보다 가까웠던 동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역시 천재라는 인물의 숙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혁파의 숙명이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개혁파였던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며 숨을 거둔 것이나 멍청이라는 별명의 탁월한 개혁자 오다 노부나가가 측근이었던-그리고 구세대의 질서를 중시하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런 개혁자들의 외로움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꾸준히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면, 결국 그들이 가고자 했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기는 편 우리편"이라는 매우 간단한 논리로서 결국 승자가 선지자라는 것으로 귀결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미디어로 살펴보는 징기스칸

[ 고기를 뜯어먹는 야만인. 많은 작품 속에서 징기스칸. 그리고 몽골제국은 야만족으로 희화되어 표현되곤 한다. (엑설런트 어드벤쳐 Copyright © Orion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의 소유주...라고는 하지만, 징기스칸에 관한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영화가 몇 편 만들어지긴 했지만, 1965년에 미국과 영국에서 만든 영화처럼 징기스칸 자체를 지극히 추하게 희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 심지어, [엑셀런트 어드벤쳐]([매트릭스]로 유명한 키아누 리브스의 초기작 중 하나.) 같은 작품에선 원시인 같은 복장을 하고 닭고기를 마구 뜯어 먹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 할리우드에서 만든 최초의 영화판 징기스칸. 몽골인은 나오지도 않는다. Copyright © Colombia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수 년 전 KBS에서 몽골에서 만든 드라마, "징기스칸"을 방영해 주었고 이와 관련하여 징기스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해줌으로서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물론, 그 전에 방영했던 "이순신" 만큼 길지도 않고 그만큼 인기도 부족했지만 말이다.그 밖에도 소설이나 각종 매체로 수없이 많은 내용이 나오면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징기스칸을 소재로 한 게임은 뭐가 있을까?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기서 가장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역사 시뮬레이션의 명가, 코에이 사의 '징기스칸' 시리즈이다. 국내에 한글화되어 출시되었던 이 작품은 총 4개의 시리즈가 소개되었는데, 윈도용으로 만들어진 [징기스칸 4]가 비교적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코에이의 여타 게임과 달리 몽골편과 세계편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작품은 몽골 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로 진행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국내판에선 고려로 진행할 수 있지만, 장수의 능력이 정말 형편없어서 골치 아프게 한다. 그에 반해 일본은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는데, 그 중에서도 플레이 스테이션용 [원조비사]에서는 -사무라이의 위력은 제쳐두고- 아예 일본 내의 통일을 다룬 별도의 시나리오까지 준비하고 있을 정도. 게다가, 징기스칸이 일본인이라는 묘한 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징기스칸의 능력치를 동일하게 만들어 놓고 있어 황당한 느낌을 준다.)

  각 지역을 점령하면서 후궁을 얻고 그녀들과의 관계를 잘 진행시켜 자녀들을 많이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특징이다.

[ 원조비사의 후궁 모드. 연애 게임에 가까운 느낌도 있었다. Copyright © KOEI All rights reserved ]

  후궁 모드가 지나치게 부각되긴 했지만, 각 국의 다양한 병종과 특색을 잘 살렸고 적당한 수준에서 세계 정복까지 이룩하는 즐거운 게임으로서 기억할만 하다.

(* 징기스칸 일본인설 - 일본 겐페이 합전 시대 유명한 장수,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가 대륙을 넘어가서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설. 그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을 드러내는 얘기이지만, 동시에 몰지각성을 드러내는 낭설이다. 요시모토와 징기스칸이 비슷한 세대의 사람이라는 점 외에 어떤 증거도 없는 개그에 지나지 않지만, 의외로 많은 일본 만화,소설에서 다루어졌다.)

[ 원조비사. 코에이의 이 작품에선, 후궁이라는 요소를 흥미롭게 -지나칠정도로- 연출하고 있다. Copyright © Koei All rights reserved ]

  그 밖에 MS사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몽골군을 선택하고 진행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몽골은 주역이 아니라는 것이 다소 아쉽다.

[ 에이지 오브 킹스. 몽골보다 일본이 부각되는 건 역시 상업적 목적일까? Copyright © Microsoft All rights reserved ]

  언젠가는 징기스칸의 매력을 잘 살린,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코에이에서 <징기스칸4>이래 시리즈가 더 나오지는 않는 것을 보면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몽골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듯 언젠가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역사를 충실하게 살릴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남의 역사를 두고 뭐라고 할 것 없이 우리 자신의 역사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충실하게 살려서 세계에 알리는게 더 필요하겠지만.



여담) 이 글은 오래전 PC 플레이어에서 연재했던 글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이나 전투를 중심으로 역사의 분기점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술, 전략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경제 등 여러가지 요소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총과 버터라는 제목은 '총(군사)'과 '버터(경제)'를 함께 살펴보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지면 한계 등으로 인해 일부 내용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시리즈물로 다른 시대의 다른 전쟁 이야기는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pyodogi )에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역시 보완해서 다시 올릴 예정입니다.


총과 버터 시리즈 전체 목록

01. 알렉산더의 위대한 원정 - 가우가멜라 전투
02. 게티스버그, 그 탄생을 위한 시련
03. 완벽한 승리, 그러나 패망으로의 첫걸음, 진주만 기습전
04. 가장 적은 소수의 가장 큰 영웅담, 배틀 오브 브리튼
05. 위대한 정복자? 살인마? 카이사르의 대원정
06. 나폴레옹 영광의, 그리고 패망의 전장 아우스텔리츠
07. 천년 분쟁의 시발, 예루살렘 공방전
08. 카게무샤의 전설, 다케다 기마군단의 패망
09. 낙양 공방전, 솥발처럼 갈라진 천하
10. 대제국의 꿈, 몽골 초원의 결전
11. 임진왜란 그 변화의 시발전, 진주 전투
12. 승리를 향한 결정타, 행주 전투
13. 전설의 역전극, 명량 해전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