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라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크로스오버, 또는 배경 설정을 공유하는 작품 시리즈의 창작입니다.
배경 설정을 공유하여 만든 창작자는 매우 많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로 유명한 로버트 하인라인의 '미래사'라던가, 필립 k 딕 역시 여러 작품에서 세계관을 공유하였고, 은하철도 999의 작가인 마츠모토 레이지 역시 '레이지 유니버스'라는 이름으로 공유를...
심지어 작품마다 전혀 다른 설정을 보여주는 것 같은 다카하시 루미코 같은 이들도 세계관을 공유하지는 않았더라도 단편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나 설정을 카메오로 등장시켜 재미를 주기도 했으니까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마사미 유우키는 한 잡지에서 '철완 버디'와 '궁극초인 알'을 함께 연재하면서 두 작품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알이 던진 알루미늄 배트를 버디가 다시 돌려주는 방식으로) 단행본으로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크로스오버를 실현하기도 했지요.
[ 궁극초인 아루(아래)와 철완버디(위). 같은 잡지에 연재된 각기 다른 두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흥미로운 크로스오버가 눈길을 끈다. 이들은 드라마 CD에서 직접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
때로는 작가 자신이 배경을 공유하거나 크로스오버를 하지 않더라도 팬이나 다른 작가에 의해 크로스오버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팬을 자처하는 이마가와 야스히로 감독이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로보"에서 요코야마 작품의 캐릭터들을 대거 출연시키거나, 역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광팬인 시마모토 가츠히코가 만화 "스컬맨"에서 이시노모리 쇼타로 작품들을 하나로 묶는 듯한 연출을 한 것이 눈에 띄죠. ("스컬맨"은 애니메이션에서도 이 같은 크로스오버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시노모리 쇼타로 자신이 "인조인간 키카이더"와 "이나즈맨"의 크로스오버를 진행한 일이 있는 만큼, 이시노모리 쇼타로 자신의 제안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기에 "슈퍼 로봇 대전" 등. 다양한 방식의 크로스오버가 등장합니다.
미국의 예로는 DC의 "저스티스 리그", 그리고 마블의 "어벤져스"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같은 크로스오버, 또는 배경 설정의 공유는 팬들에게 있어 작품을 다채롭게 바라보는 재미를 줍니다. 하나의 작품에서 여러 작품의 주역들이 함께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죠.
그러나... 이 같은 크로스오버, 또는 배경 설정을 공유하는 작품을 보다 보면 가끔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크로스오버가 아닌 독립 작품을 바라보면 왠지 주인공들이 불쌍하게 여겨지기 때문이죠...
"슈퍼 로봇 대전"이나 "자이언트 로보"처럼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졌거나, 로버트 하인라인의 미래사처럼 시대가 전혀 다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궁극초인 알"과 "철완버디"처럼 스타일도 내용도 완전히 다른 작품의 일시적인 크로스오버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이번에 소개된 "어벤져스"와 "아이언 맨 3" 같은 관계라면 사실 조금 애매하거든요.
[ 토니 스타크 혼자 강화복 수십대를 이끌고 싸우는 아이언맨 3. 그런데 정작 그를 위기에서 구한 동료는... ]
"아이언맨 3"가 개봉했을때 "아이언맨이 고생할 때 어벤져스의 다른 멤버는 뭘 하나?"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렇죠. 대통령이 위기에 빠질 정도의 큰 사건. 미국을 위협하는 거대한 테러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토르'나 '헐크' 같은 이는 등장하지 않는게 당연하다고 쳐도 최소한 '캡틴 아메리카' 정도는 등장할 법 하지 않을까요? ^^
[ UFO 로보 그렌다이저. 도대체 마징가는 어디다 팔아 먹었니? ]
이런 상황은 같은 배경을 무대로 하고 있는 나가이 고의 로봇물에서도 보여집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 "마징가 제트 대 그랜다이저"가 있습니다. "UFO로보 그랜다이저"라는 작품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기에는 마징가 제트의 조종사인 쇠돌이(카부토 코우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할아버지의 선물인 마징가 Z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전혀 선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약해 빠진 비행접시 한대 가지고 고생고생하고 있죠.
도대체 마징가는 어디에...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위의 극장판에서 마징가 제트가 등장합니다. 알고 보니 마징가는 '로봇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지요. 그것도 당장 출동할 수 있는 상태로 말입니다.
카부토 코우지를 잡아서 그렌다이저의 약점을 찾아내려했던 원반성인이 마징가 Z의 존재를 알고 이를 이용해서 그렌다이저와 싸운다는 내용인데, 마징가는 거의 그렌다이저와 막상막하로 싸웁니다. 아니, 외계인이 침공해서 세계가 위험에 빠졌는데 이런 강력한 로봇을 전시해둔다는게 말이 됩니까?
퍼시픽 림처럼 조종사가 없다면 모르겠습니다. (퍼시픽 림 소설을 보면, 처음 카이주를 물리치기 위해 핵병기를 사용했던 흔적에 마크 1, 2의 예거들이 폐기된 상태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패러디일지 모르지만, 영화 속에서도 마크 3의 조종사가 주인공을 빼면 한 명도 없다거나, 마크 1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 등이 소개되죠. 게다가 예산도 부족하니 폐기된 예거를 다시 사용하기도 힘들테고....라는 설명이 굳이 퍼시픽 림에 필요하진 않겠지만.^^)
게다가 그 옆에는 '그레이트 마징가'도...!!! 도대체 뭔 낭비인지....
하지만 그 어떤 크로스오버(또는 배경 설정의 공유) 시리즈도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천지무용! 료오키"의 카지시마 마사키가 만든 작품들입니다.
[ 카지시마 마사키의 천지무용!!(단, 일부 캐릭터는 카지시마 판과는 관계없음.) 평범한 미소녀 하렘물이 아니라 SF로서의 설정도 참 다채롭다. ]
아마도 요즘에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아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이 사람의 세계관은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지무용!! 료오키"와 "천지무용 GXP"가 같은 세계관인건 말할 필요도 없고, 천지무용 시리즈의 주인공인 텐치의 동생인 켄시가 나오는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 역시 같은 세계관.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와 동일한 기술이나 같은 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포톤". 여기에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듀얼! 패러럴 룬룬 이야기"도 다른 우주라거나 그런 건 있어도 결국 하나의 배경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완결되지 않았던 성인물 "아가루타"도 천지무용과 같은 배경을 가진 것은 맞고요.
여기서 시대가 완전히 달라 보이는 "포톤", 그리고 다른 우주의 이야기로 보이는 "듀얼! 패러럴 룬룬 이야기"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천지무용!! 료오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천지무용 GXP"와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를 볼때 쓴 웃음을 짓게 되는 건, 이들 이야기의 주역인 야마다 세나, 또는 마사키 켄시는 어떻게 보면 쓸데 없이 죽을 고생을 하는 캐릭터가 되기 때문이죠.
"천지무용!! 료오키"에서 -시리즈 1막이 끝난 3부 시점에서- 최강의 캐릭터는 "마사키 텐치"입니다. 이 캐릭터는 이 세계를(그리고 아마도 "듀얼!"이나 "성기사"의 세계도) 만들어낸 세 여신보다도 한 차원 높은 존재거든요.
각성한 상태의 그는 수명이 영원합니다. 즉, 불로... 게다가, -우주를 소멸시킬 정도의 힘이 있다면 텐치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를 죽일 수도 없으니- 사실상 불사. 여신들의 차원인 고위 차원을 흔들고 부셔버릴 수도 있는 힘이 있다고 하니 뭐 말 다했지요.
텐치를 제외하고도 텐치 일가의 캐릭터들은 무적입니다. 우주를 창조한 세 여신 중 두 여신이 동거 중이고 우주 최강의 해적과 해적선이 있고, 단독으로 어지간한 나라의 함대를 상대할 수 있는 수뢰의 우주선을 소유하고 있는 수뢰 황가의 황녀가 있는데다, 우주 최강의 현상범이라고 할 수 있었던 범죄자의 또 다른 분신인 동시에 우주 최강 해적선에 맞먹는 위력을 자랑하는 수뢰의 우주선을 가진 인물이 또 하나, 갤럭시 폴리스를 좌우할 수 있는 거대 가문의 장녀인데다 확률의 천재라 할만한 인물이 있고, 여기에 또 다른 여신도 동거는 아닐지 몰라도(아니 사실상 같이 사는거나 같을까요?) 함께 있는 상황...
오죽하면 "천지무용 GXP"에서 주인공 세나를 끊임없이 위협했던 해적이 지구를 찾아왔다가 처참하게 박살나서 도망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국가 규모의 감시망이 펼쳐져 있는데... 사실 그래봐야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일가가 우주를 창조한 존재들인데다, 동시에 우주를 마음대로 뒤흔들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도 해도 좋으니,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일가조차도 상대가 안 될만한 괴물들인 것이지요.
만일 그들이 마음 먹으면 "천지무용 GXP"의 이야기는 곧 엔딩이고,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에서 텐치 일가의 누구든 켄시 대신 저 세계에 가면 도착한 시점에서 결말이 나버리게 됩니다. 불행의 끝을 달리는 야마다 세나나 마사키 켄시의 고생이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듯한 먼치킨 일가인 것이지요.
[ 카지시마 마사키 특유의 하렘 결말(정확히는 일부 다처제)을 여실히 보여주는 다른 세계의 성기사 이야기. 근데 주인공은 뭔 고생이래? ]
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될 수 없죠. 그러니 카지시마 마사키의 세계관에서 텐치 일가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고 그냥 평범한(?) 가정으로서 지구에서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파괴할 만한 초차원의 존재가 농사일이 주업이고, 우주를 창조한 여신 중 하나는 연구와 발명에 여념이 없고, 또 다른 여신은 부엌떼기, 우주 해적은 술타령, 우주해적선은 당근만 밝히는 먹보가 되었고, 황녀도 빨래를 널거나 우주 해적과 말 다툼 외엔 한가한 하루하루, 우주 최악의 현상범의 분신체였던 인물도 역시 부엌떼기, 우주 경찰을 좌우하는 가문의 장녀는 항상 잠만 자고 있는...
뭐 그런 상황이 계속됨으로써 나머지 작품들의 이야기는 흘러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야마다 세나의 모험도, 마사키 켄시의 모험도 알고 보면 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그러한 텐치 가문의 가훈 "자신의 엉덩이는 자신이 닦아라.(자신의 일을 자신이 해결해라.)"
그래서 앞으로도 카지시마 마사키의 작품들에선 그 먼치킨 일가와 관련된 이들이 -그들 일가라면 1초, 아니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게 할 일을- 죽어라 고생하면서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세나에게는 세나의, 켄시에게는 켄시의, 그렌다이저에게는 그렌다이저의, 아이언맨에게는 아이언맨의... 적이 있는 법이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쓰러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 와중에 몇 명, 몇 십명, 몇 백명, 몇 천명... 아니 세계가 위험에 빠지건 말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뭐, 그런게 역시 크로스오버나 배경 설정을 공유하는 작품의 재미가 아니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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