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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작품 이야기

저들은 왜 멸망에 대비할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종말론 방송들

  세계에는 많은 다큐멘터리 채널이 있으며, 제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가령 히스토리 채널은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거나(최근엔 리얼리티 방송 중심인 느낌이 들지만), 영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은 새로운 발명품이 눈길을 끈다거나...

  한편 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잡지로 시작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주로 자연의 경이를 보여주는데 주목하곤 했지요.


  그런데 최근 이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는 기묘하게도 ‘멸망의 날’과 관련한 내용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갑자기 미국 전역에 전기가 나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진짜처럼 연출한 ‘대정전(Blackout)'같은 거 말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눈에 띄는 건... 그리고 자주 하는 건 바로 ‘둠스데이 프레퍼스’라는 다큐멘터리입니다.





  Doomsday Preppers... 뜻 그대로 ‘멸망의 날을 준비(대비)하는 자들’이 될까요? 미국 내에서만 수 백 만 명에 이른다는 ‘준비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준비하는지, 그리고 그 준비가 과연 충분한지 등을 이야기하는거죠.


  별별 사람들이 다 등장합니다. 화생방 훈련이나 생존술 훈련은 기본이며, 변두리에 거주지를 세우는 것은 물론이며 집안에 벙커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도 주변 사람들이 모르게 몰래 말이죠.(그러면서 TV에 나오는건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언젠가(적어도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멸망이 찾아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멸망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근래에는 EMP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령 태양 폭풍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기 장치가 모두 작동하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서 위험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이죠.


  그들 중 많은 이는 전직 군인이며 관련된 훈련을 받은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은 ‘가까운 미래에 멸망이 찾아올거다.’라는 불안감이지요. 바로 그것이 이들이 ‘준비(대비)’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런 상황을 더 쉽게 느끼고 겪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릅니다. 십 여 년 전 9.11 사건 이후 미국에는 온갖 종류의 재난(?)이 밀려왔으니까요. 그중 상당수가 인재, 또는 결과적으로 인재라고 할 만 한 것이었지만, 여하튼 세상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이런 방송을 열심히 봅니다. 최근에는 ‘둠스데이 캐슬’이라고 해서 한 가족이,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성을 세우는 이야기를 8부작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멸망의 날 세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본래 방송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둠스데이 프레퍼스’나 ‘둠스데이 캐슬’ 같은 방송은 자연스러운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사람들이 열심히 보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그 같은 방송 자체가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대정전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분명히 재미있지만, ‘이런 일이 정말로 생길지 모르니 대비해야 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게다가 “둠스데이 프레퍼스” 같은 방송을 계속 보여주니 마치 자기 혼자만 준비하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겠지요. 그리고...


  영화 “페이첵”에서는 미래를 보는 장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장치로 예견한 미래는 모두 들어맞게 되지요. 문제는 미래를 예견한 결과가 미래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가의 대폭락을 예견하면 사람들이 주식을 팔아버립니다. 질병의 대유행을 예견하면 혼란과 불안이 그러한 상황을 더 부채질하며 서로를 외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전쟁을 예견하면...




  “둠스데이 프레퍼스”, “둠스데이 캐슬” 같은 다큐멘터리는 결국 이 같은 ‘미래경’의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방송의 유행은 2012년을 앞두고 번졌던 세계 멸망설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눈 앞의 현실보다는 올지 안올지 모르는 멸망에만 쏠리게 합니다. 그것도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하자.’라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 올 테니 나 혼자라도 살아남자.’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멸망의 날 가게’ 같은 곳을 뒤져보고, 쓸데없이 물건을 사서 채워두고, 집을 개조하고 대피 장소를 세웁니다. 이웃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물건 값은 쓸데없이 올라가고, 삶은 그만큼 불편해 집니다.



  1983년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 한 방송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The Day After-그날이 오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미국의 한 도시를 무대로 핵전쟁 뒤의 모습을 그려낸 이야기였지요. 그날 방송국에선 시청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전화를 준비했지만, 그 누구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두들 충격으로 전화를 걸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은 핵전쟁 이후의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전쟁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미국 전역에서 핵전쟁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탄생했고, 수많은 이가 이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전략핵감축 협상이라는 결실까지 맺게 되었지요.


  전략핵감축 협상이 타결되는 날, ‘지구 멸망 시계(지구가 멸망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표시하는 시계)’가 처음으로 반대 방향으로 돌려졌다고 합니다. 한 편의 방송이 우리의 삶을 바꾸고, 멸망에서부터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단순히 불안감을 조장하고 미래를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에만 대비하도록 강요하는 형태의 방송은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는 방송... 적어도 그것은 ‘둠스데이 프레퍼스’나 ‘둠스데이 캐슬’ 같은 형태의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방송이야 말로 그 같은 ‘미래를 밝은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송을 준비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적어도 전에는 조금 더 그런 방송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는 말이지요.


[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마련된 둠스데이 프레퍼스 관련 상품. 방독면 같은 것까지 파는 건 아닙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