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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원정? 침공? 역사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용어

  교과서를 보면 수많은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 중 상당 수는 결과적으로 같은 뜻이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원정'과 '침공'이지요.(또는 ‘정벌(정복)’과 ‘침략’)


  각각의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정 : 먼 곳으로 싸우러 감


침공 : 다른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 공격함


  이렇게 보면 분명히 다른 뜻이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합니다.


  예제를 살펴보죠.


‘나폴레옹은 러시아로의 원정에 실패하면서 몰락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로의 침공에 실패하면서 몰락하였다.’





  결국 두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은 다르죠.


  원정이라고 하면 왠지 ‘우리 편’ 같은 느낌이 돌고, 침공이라고 하면 왠지 ‘남의 편’이라는 느낌이 드는...


  결국 이 용어에서는 ‘내편, 니편’을 가르는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차이는 ‘침공’이나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광개토대왕의 북방 원정(정벌)’

‘광개토대왕의 북방 침공(침략)’


  용어만 바꾸었을 뿐인데 참으로 느낌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광개토대왕이 왜 침공했냐? 거기 우리 땅이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바꾸어 보죠.


‘스페인의 잉카 원정’

‘스페인의 잉카 침공’


  아무리 보아도 두 번째는 스페인이 나쁜 놈 같습니다. 앞의 것은 뭔가 개척정신이 느껴지고....


  우스운 말이죠. 스페인의 행동이 ‘원정’이건 ‘침공’이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민폐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거기에 아무도 없었고(이를테면 원주민 조차 살지 않았고) 말 그대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것이라면 모를까, 거기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결과 그들이 좋아졌건 나빠졌건 그건 ‘침략’이 아닙니까?


  광개토대왕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습니까?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히는 과정은 분명히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는 당연히 피해자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봐야 그들에게 있어서는 광개토대왕은 ‘침략자’ 이상의 그 무엇도 되지 못합니다.


  ‘침공 결과 더 좋아지지 않냐?’라는 의문을 던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를테면 카이사르의 로마가 갈리아를 ‘침공’하여 갈리아 사람들의 삶이 좋아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로마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리아인들이 죽고 상처입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래도 당신 자손들은 더 행복하지 않겠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자손조차 모두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원정과 정벌이라는 표현은 이 같은 피해자의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며 잊어버리게 만드는 최면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보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지요. 나아가 




  침략과 침공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드는 전쟁 행위입니다. 그것을 ‘원정’이나 ‘정벌’, 또는 ‘정복’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은 승자의 변명일 뿐이며, 승자를 칭송하고 동일시키려는 잘못된 인식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눈 앞에 역사 책이 있다면 원정이나 정벌, 정복이라는 말 대신에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말을 넣어서 다시 읽어보세요. 아마도 이제까지는 보지 못했던 역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를 배우고,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담) 사실 이런 말은 한자말로만 있는게 아닙니다. 영어에도 Conquer(정복)과 Invade(침략)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자신들의 조상에게는 Conquer를, 남의 조상에게는 Invade를 쓰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진을 보며 우리는 '정복자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기도 하겠지만, 저 뒤에는 죽어가는 수많은 장병들이, 그 앞에도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폴레옹은 훌륭한(?) 침략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