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오늘 이야기 - 장애와 마주하여 빛을 남긴 사람


장애 (명사)

1) 어떤 일의 성립, 진행에 거치적거려 방해하거나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함.
2)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두 개의 뜻은 다르지만, 한편으로 이는 같은 의미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신체나 정신의 장애라는 것은 사회 생활을 하고 꿈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장애인에게 차별이 있거나,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2번의 뜻은 1번의 뜻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을 갖기도 합니다. 사실상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의 오늘(1852년 1월 6일) 프랑스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는 건강했던 그는 3살 때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쳐 멀었고, 오른쪽 눈도 감염으로 4살이 되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 즉,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시각장애인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것 말고 이렇다 할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두 번의 행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행운은 그의 가족이 그를 스스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지원했다는 점입니다. 부모의 지원으로 그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마을의 카톨릭 신부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여러 가지 일을 직접 하도록 가르치고 도와주었지요.

두 번째 행운은 그가 파리의 왕립 시각 장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돈은 풍족한 정도가 아니었기에 그는 빵과 물로만 연명해야 했지만, 그가 구걸에 나설 필요가 없도록 해 주었고, 학교를 마친 뒤에는 그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얻어 학생들에게 기초적 기술과 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존경 받는 선생님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교사 생활 중 또 다른 두 번의 기회(다른 이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새로운 결과를 거둡니다. 바로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쓰기도 가능하고 글자만이 아니라 문장 기호, 그리고 수학 기호나 음계도 표현할 수 있는 알파벳 점자 체제를 창안한 것이지요.

43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은 시각 장애인, 루이 브라유가 창안한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 체계는 비록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점차 그 유용성이 인정받아 세계에 퍼져나갔고 지금도 세계에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이 점자 체제에 그의 이름을 붙여 “브라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브라유가 만들어낸 점자 체계. 영어권에선 이를 브라유라 부른다.


갑작스러운 장애로 어려움을 겪게 된 브라유가 존경받는 교사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불편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점자 체제를 고안하여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요?

우선은 무엇보다도 그가 장애라는 고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이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그에게 여러 행운이, 정확히 말하면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의 가족이, 그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기보다는 그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는 반면, 집에서는 모든 일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기초적인 학문을 익힐 수 있었고, 구걸 대신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노력을 갖게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시 프랑스에 왕립 시각 장애 학교가 존재했으며, 그가 장학금을 받아서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만일 왕립 시각 장애 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그를 장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루이 브라유는 학문을 계속할 수 없었고 점자 기술을 배워서 이를 발전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세계의 시각 장애인들은 읽기 밖에 할 수 없는 불편한 점자 체제, 또는 손을 여러 번 움직여야 읽을 수 있는 점자 체제에 의존하며 어렵게 소통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루이 브라유의 점자가 탄생하여 세계의 시각 장애인들이 혜택을 보게 된 것은 160년 전의 파리에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존재했으며, 그들에 대한 장학금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장애인이라도 배움을 얻을 수 있는 학교,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장학금 복지 체제… 다시 말해 사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루이 브라유는 훌륭한 교사로서 존경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몸이 좋지 않아 안마를 받으며 시각 장애인 안마사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현재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교육학을 배우고 있다고 하시는데, 장래에는 유네스코(국제 연합 교육, 과학 기구)에서 일을 하면서 장애인과 무슬림을 위한 교육에 평생을 바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 할 때는 단순히 ‘대단한 마음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루이 브라유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니 그 분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더군요. 과연 160년 전의 프랑스에 비해 2012년의 대한민국은 얼마나 나은 것일까라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시각 장애인들에게 열린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안마사 직업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디지털 시대, 스마트 시대라고 하지만, 국내의 스마트폰 상당 수는 시각 장애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무용지물이 되고 있지요.

  점자 도서관은 몇 군데 되지 않으며 그나마 책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전자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현실이지만, 음성 지원 등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별로 없어 역시 도움이 안 되고요.

제가 이야기했던 안마사 분은 그나마 저희 회사의 안마사로 채용되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꿈이 ‘안마사’인 현실이 계속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녹음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방송통신대학원을 통해서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요? 하지만, 방송통신 대학교 이외의 문이 그다지 열려있지 않다는 현실은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장애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것은 1차적으로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사회에서 이를 지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160년 전에 태어난 한 사람이 사회의 작은 도움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수많은 ‘미래의 루이 브라유’가 더욱 많은 기회를 얻고 더욱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