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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우주 이야기

베르너 폰 브라운 이야기

  1977년 06월 16일. 미국에서 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65년을 살아온 만큼 비교적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안타까움을 남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의 우주 개발 계획을 이끄는 견인차였고, 인류를 우주로 보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달에 발자국을 남기게 함으로써 "인류에게 있어 위대한 도약"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너머를 보고 있던 인물. 그의 이름은 바로 독일 출신의 미국 로켓 기술자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Magnus Maximilian Freiherr von Braun)이었습니다.





 

  1912년 3월 23일 독일 동부의 포젠 근교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폰 브라운은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망원경을 통해 천문학과 우주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 그의 고향인 비르지츠(Wirsitz)가 폴란드에 양도되면서 그의 일가는 다른 이들처럼 독일령으로 이주하여,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훗날 로켓 개발을 진행하는 폰 브라운이었지만, 본래는 물리학과 수학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로켓 개발의 선구자인 헤르만 오베르트가 쓴 <행성간 우주용 로켓(Die Rakete zu den Planetenraumen)>이라는 책을 통해 로켓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폰 브라운은, 로켓 개발의 꿈을 꾸며 꼭 필요한 학문인 수학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로켓 연구를 시작한 폰 브라운은 독일 우주 여행 협회에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2년 동안 80회 정도의 로켓 발사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많은 청중 앞에서 실험을 보여주며 로켓과 우주에 대한 관심을 끌고자 했는데, 그 실험을 목격한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을 베를린 공과 대학에 추천하여 로켓 연구를 계속하도록 도왔다. (당시 독일은 장거리 포의 개발이 금지되어있었기에 나치 독일에서는 로켓을 군사용으로 이용하고자 로켓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다.)

 

  폰 브라운은 헤르만 오베르트의 밑에서 액체 연료 로켓 엔진 실험을 도우며 1934년에는 2.4km 고도에 달하는 로켓을 쏘아올릴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군사용 이외의 모든 로켓 실험을 금한 것이다.

  결국 폰 브라운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군사용의 로켓,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게 된다. 우주로 날아갈 수 있는 로켓의 개발을 꿈꾼 폰 브라운은 그것이 군사용 병기로 사용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당시 폰 브라운은 나치당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치에 대해 협력하겠다는 뜻이기보다는 오직 로켓 개발을 계속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의 손에서 훗날 '보복병기 2호(V2)'라고 이름붙여진 로켓이 만들어져 연합군의 영토로 날아갔다.

 

  전쟁이 끝날 무렵, V2의 위력에 놀란 미국과 소련은 제각기 V2 개발자들을 빼내기 위한 첩보전에 돌입하였다. 당시 패망하고 있던 독일의 친위대(SS)에서는 로켓 개발과 관련한 자료를 모두 파기하고 개발자들도 처단할 계획을 세웠지만, 폰 브라운과 동료들은 무사히 빠져나가 미군에 합류하였다. (또 다른 동료들은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의 로켓 개발을 돕는다.)


  이번에야 말로 폰 브라운은 우주 여행을 위한 로켓 개발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한국 전쟁의 발발에 자극받은 미국은 그와 동료에게 핵탄두를 장착한 유도 미사일 개발을 지시했다.


  유도탄의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폰 브라운은 우주 로켓 개발을 꿈꾸었지만, 독일 출신, 그것도 나치당 가입 경력이 있는 그에게 '우주 로켓 개발 1호'라는 영광을 안겨줄 생각이 없었던 미국에서는 그의 로켓 대신 해군에서 개발한 뱅가드 로켓을 사용하게 했다. 하지만, 뱅가드 로켓의 발사 준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사이 소련에서는 폰 브라운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지휘 아래 최초의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다.


  결국 초조해진 미국에서는 뱅가드 로켓을 즉시 쏘아올리도록 지시했지만, 뱅가드는 제대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폭발하여 미국 정부를 망신시키고 말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뱅가드를 조롱하는 뜻으로 Flopnik(플롭프니크, FLOP 주저앉다), Oopsnik (웁스니크, OOPS - 아이고!), Kaputnik (카푸트니크, Kaput - 망가진), Stayputnik(스테이푸트니크, Stay put - 머무르다.) 등의 표제가 실렸다.)

 


[ 뱅가드 로켓의 폭발. 그리하여 폰 브라운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다. ] 

 

  뱅가드를 대신하여 바톤을 쥔 폰 브라운은 여러 기관을 합쳐 새롭게 탄생한 항공우주국(NASA)의 마셜 우주 비행 센터 소장이 되었고, 1958년 익스플로러 1호를 시작으로 하는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개발한 전장 110m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새턴V 로켓은 아폴로 우주선을 달 궤도까지 보내어 안착시켜 닐 암스트롱이 내딛은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을 성공하는데 이바지했다.


  아폴로의 성공 이후 폰 브라운은 화성 로켓의 개발에 착수했지만, 아폴로 성공, 그리고 소련의 헛걸음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경쟁이 필요없게 된 미국에서는 아폴로 17호 이후의 모든 계획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실망을 감추지 못한 폰 브라운은 1972년 NASA를 떠나 독자적인 우주 개발을 위해 민간 회사인 페어차일드 항공 우주 회사에 기술 개발 부사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장암으로 쓰러졌고 결국 1977년 6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그가 개발한 새턴 V는 1973년 미국의 우주 정거장 스카이 랩을 우주에 띄우는데 사용되었지만, 이후 사용이 중단되었고 지구 주변에만 겨우 오를 수 있는 우주 왕복선이 대신하기에 이른다.

  그후 NASA에서는 2010년에 퇴역할 예정인 우주 왕복선을 대신하여 강력한 아레스 로켓의 개발을 발표했지만, 그조차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폰 브라운이 바랐던 누구나 자유롭게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그리고 우주에 머물러 생활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도 찾아오지 않고 있다. 근래에는 민간 회사들의 합류로 새로운 희망이 보이긴 하지만...


참고 - 미국의 우주 비행... 9년간의 공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