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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01 :: 총포의 역사적/전술적 의미 ~총포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역사 이야기 2014.03.01 23:44



  총포의 발명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기는 이른바 근대라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장에 선보였다.

  이들은 그후 전장에서 다채로운 활약을 보여주게 되는데, 그 중 화포는 특히 당시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오스만투르크에 의해서 공성병기로서 활용되어, 콘스탄티노플 전투 등에서 위용을 발휘하였다.

(* 포의 경우는 중국 송나라 때로 추정되나, 총의 경우는 14세기 중국의 화포가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포는 상당한 대형이었고 운용에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존의 병과와는 별개로 운용되었다. 포는 특히 공성전에 있어서 고래로부터 사용되어 왔던 다양한 공성병기들을 대체하였으며(주로, 망고넬(투석기)과 캐터펄트(노포)를 대체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공성부대(혹은 포병)이라고 불리던 병과는 이제 화포라 불리는 최신의 병기로 무장한 부대로 바뀌게 된다.


  처음에는 공성병기로만 사용되던 함포는 동양에서, 그리고 서양에서, 그것의 무게를 견디고 수송할 수 있는 함선과 연결됨으로서 해전(혹은 수전)에 도입되기에 이른다. 초기에 공성 병기로 활용되던 함선의 함포는, 15~16세기에 들어 영국, 조선 등지에서 해전에 도입됨으로서 해상 전투의 전술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조선의 화포 기술은 당시 동양권에서 (특히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그다지 우수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함포는 해군에서 널리 응용되긴 하였으나, 이것은 기술적인 면의 진보가 아니라 단지 함포를 열심히 쓰고자 한 이들의 노력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신기전이나 비격진천뢰 같은 병기는 이미 중국에서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던 것이었으며, 일본의 경우만 해도 이미 오다 노부나가 등이 철제 대포를 도입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의 천자총통 등은 아직 청동제로 되어 있어 빠르게, 많이 발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가 육군에서도 화포를 도입해서 운용했던 것과는 달리(명-청 전쟁 당시 청의 기마 군대는 명의 화포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수군에서만 활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수군의 이점은 화포 기술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주로 함포전을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함선을 설계하고 이를 충실하게 운용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벽에 대한 무모한 돌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측은 먼 거리에서 다수의 화포로 성벽을 적중시키고 무너진 성벽을 통해 부대를 돌입시켰다. 기사들의 용맹도 왕의 위엄도 화포 앞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기술자와 시민들이 주역이 되어 활약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전적인 개념의 높고 위압적인 거성들은 낮고 두꺼운 근대식 성벽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더 이상 마을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성곽은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영주의 의해 만들어지던 성벽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넓은 차원에서 전략적 거점에 방어용으로 세워지는 요새들이 중심이 되어 갔다. 이런 지역은 영주의 영토 바깥에 있었고, 왕의 권한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성에 의존한 영주들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었다.



  왕은 화포 기술을 국가 시책으로 독점하였으며 어떤 영주도 그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영주들의 성들은 하나둘 해체되어 갔다.



  더욱이 해전에서도 기사와 맹장들이 활약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함포 기술은 가까이 붙을 필요없이 먼 거리에서 적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으며, 대포를 쏘는데는 강철의 갑주와 용맹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육박전이 사라짐에 따라서 유사시 노수들이 전투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갈레선이 사라지고, 대형의 갈레온이 이 뒤를 이었지만, 곧 작고 가벼우면서도 함포 공격력에 치중한 프리깃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 배에는 더 이상 육박전용의 해병대가 필요치 않았다. 멀미나 하는 육군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해군 지휘관들은 그들을 기꺼이 배에서 추방하였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정확하게 함포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수병들이 뒤를 이었다. 육체 노동을 하는 수병은 물론 필요하였지만, 무거운 갑주는 배위에서 부담이 될 뿐이었고, 포병들은 이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에 따라 수병의 지휘관들도 바뀌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함선에는 오랫동안 배 위에서 생활해온 이들이 지휘관으로 탑승하게 된 것이다. 애꾸눈도, 절름발이도 능력만 있다면 수병의 지휘를 맡을 수 있었고, 활약할 수 있었다.



  14세기 경에 화포의 축소형으로서 개발되었던 소총은 15~16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당초 대포와 마찬가지로 지연 신관(심지)을 이용하여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스타일로 개발되어, 총이라기보다는 포라고 하는게 어울리는 이 병기는 스프링에 의한 격발 장치의 도입으로 인해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화승총으로 변화함으로서 보다 높은 효율을 갖게 되었지만, 실상 전장에서는 그다지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화승총은 총구를 청소하고, 화약을 부은 후에 탄알을 넣고(때로는 종이 등을 채워 넣어 총알이 굴러 나오지 않게 하고) 다시 화승의 화약 접시에 화약을 붓는 등의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사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활의 경우, 익숙해지면 분당 6발 이상, 기계식 노의 경우에도 분당 2발 정도를 발사할 수 있었으나, 화승총은 분당 1발도 발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습기가 심하면 화승의 불이 꺼져 발사할 수 없었으며, 고장이 잦고 오발이 많아서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효 사거리는 100m 정도였지만, 50m에서 사람을 명중시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정확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 즉 유효 사거리는 50m 정도였다. 활의 경우 나라에 따라 다르나 45도 각도로 발사시 최대 사거리는 100m를 간단하게 넘겼으며(영국의 장궁병은 유효 사거리가 230m에 이르렀다.), 노의 경우에는 직선 사격을 해도 유효 사거리가 70m를 넘었던 것과 비교할 때 상당히 효율이 떨어지는 병기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소총은 칼에 비해서 위력이 뒤지는 문제도 있었다. 근접거리에서 그 위력은 절대적이지만, 발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기병대의 돌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량으로 운용하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보완이 되겠지만,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비싼 가격의 소총은 그렇게 다수로 사용할 영주들은 존재치 않았다. (* 총이나 포의 소음은 일단 겪어보면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화약조차 본적이 없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한번 겪어본 후로 대포나 소총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스페인의 침략자에 의해 잉카 등이 멸망한 것은 화포의 위력도 -유럽에서 전해졌다고 잘못 알려진- 여러 질병 때문도 아니며, 단지 그들 자신의 정치적 내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유럽에서도 그리고 동양에서 최초로 총을 도입한 일본에서도 총은 병기로서보다는 사냥, 혹은 암살 목적에서만 운용되었으며 속칭 ‘비겁한 병기’로 불리며 천시되었다.



  당시 동양과 서양에서 군대의 주력은 기병과 창병이었으며(여기에 궁병과 소수의 포병이 추가되었다.) 총병은 별도의 병과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극소수로 운용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총은 전쟁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총이 기존의 활은 갖고 있지 않은 강력한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단점 투성이로 보이는 총의 강력한 이점. 그것은 바로 활에 비해 익숙해지기 쉽다는 것이었다.


  100년 전쟁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장의 주역은 소수의 용병이나 기사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을 주축으로 한 국민군, 그리고 정부군으로 바뀌어 나갔다.

  전장에서 동원되는 군대는 도시 국가 시대처럼 수천, 고작해야 1만에 이르는 게 아니라 많게는 10만, 20만이 동원되기까지 했다.

  왕의 권력은 봉건 시대와는 달리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기에(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의 말이 전해진다.) 국민 동원령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권력에 도전할 영주나 기사들은 이미 가신이나 신사로 바뀌었으며 왕이 모은 군대를 지휘하는 일개 지휘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로 동원한 군대의 효율성이었다. 군대의 병사라는 것은 -훈련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짧은 기간에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이나 창의 훈련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무엇보다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역시 군대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는 장거리 부대. 즉, 궁병의 육성이었다.



  기사의 쇠퇴와 봉건주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편으로 최초의 국민군 개념이 도입되었던- 100년 전쟁 당시 영국은 대규모 장궁병 부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궁술을 장려해야만 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은 안식일(일요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국왕은 칙명을 내려 안식일에 모든 놀이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직 활쏘기 만은 장려함으로서 장래 국민국의 고용에 있어 필요한 준비를 갖춘 것이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크레시나 아젱쿠르(Agincourt)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것은 영국의 궁병 부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은 아니다. 비율적으로 볼 때 영국은 장궁병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숫자로는 프랑스의 궁병과 노병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이런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국이 궁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던 반면 프랑스는 그들의 장거리 부대를 중기병과 철갑병의 보조 역할로만 생각했던 점. 여기에 영국 지휘관의 유능함과 프랑스 지휘관(양쪽다 국왕)의 무능함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궁병의 운용에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조준과 사격은 빠르지만 이를 일제 사격 등으로 체계화시키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필요하다.(활은 몸의 힘을 사용해서 당긴 상태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발사하기가 어려운 병기이다. 여기에 사람마다 그 사거리가 달라서 필요한 지점에 필요한 만큼의 공격력을 집중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때문에 궁병은 시간이 흐를수록 -훈련 기간이 짧고 일제 사격과 원하는 지점에 공격력을 집중하기 좋은- 노병으로 바뀌게 된다.

(여담 - 서양의 Crossbow는 흔히 석궁(石弓)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번역되고 있다. 이는 노(弩)라는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에서 번역에 실수가 있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계승하여 석궁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석궁은 새총 같은 것으로 돌을 날리는 무기이므로, 화살을 날리는 crossbow는 노나 노궁, 또는 십자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노는 활(특히 장궁)에 비해서 병사 1명이 차지하는 공간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옆으로 어느 정도 긴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량의 운용에는 역시 어려움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대규모 노병은 진형을 체계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었으며, -특히 방어전의 경우- 활에 비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에서 노의 여러 가지 이점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 보다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 공간마저도 좁게 차지하는 장점을 가진 총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총은 초기의 심지 타입 핸드건에서 벗어나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화승총 방식으로 변모되었기에 -불발 등의 문제가 있긴 했어도- 일제 사격 등을 사용하기도 좋았다.

  더욱이, 정확하게 명중시켜야만 되는 노나 활과는 달리 소총의 탄환은 몸의 어디에 상처를 입혀도 전투력을 확실하게 저하시킬 수 있었다.(격전 중에 다리나 팔에 화살이 맞은 채로 싸우는 병사들은 넘쳐나도록 많았으며 발달된 가볍고도 튼튼한 강철제 전신 갑옷은 이 피해조차 줄여주었지만, 소총 탄환에 대해서는 이 갑옷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총신이 길고 공간을 좁게 차지하여 그야말로 대량의 집중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당시 총기의 가장 큰 문제는 오직 하나 ‘너무 비싸다는 점’ 이었지만, 당시 전장의 주력이었던 기병의 구성과 운용비에 비하면 훨씬 저렴했다.)


  그리하여 총기의 여러 가지 이점에 눈독을 들인 지휘관들은 소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서.(정확히는 소규모의 소총병이라고 해도 과거와는 달리 원하는 지역에 집중배치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기병은 더 이상 전장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파이크병과 장궁, 여기에 노병의 등장으로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기사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그리하여 그 유명한 돈키호테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낮은 계급의 아시가루(足軽)에 의해 구성되던 장창병과 소총병이 사무라이의 권위를 박살내고 있었다. (* 창병과 소총병의 공통점은 둘 다 좁은 공간에서 집중 운용이 가능하며, 훈련 기간이 짧고 대량 운용시에 큰 효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병은 아직도 기동성이라는 이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전장에 도착한 뒤에만 쓸모가 있을 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말의 유지를 위한 보급품 수송으로 도리어 지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일부 평야를 제외할 경우 기병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공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더욱 편하고 습한 기후에도 사용할 수 있는 부싯돌 식 점화 장치가 등장하고, 여기에 총 끝에 끼우는 총검이 추가됨으로서 창병조차 의례 행사 속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전투는 더 이상, 경험이 많은 용병이나 일기당천의 맹장에 의해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징집된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서 실시되었다.


  불과 한달 이하의 훈련으로도 수년간 훈련받은 기사 수준의 파괴력과 수개월 이상 훈련받은 궁병 수준의 정확성을 가지고, 창병처럼 좁은 곳에서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소총병이 전장의 주력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19세기에 이르러 전쟁의 병과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바로 소총병과 포병으로...(구 시대의 유물인 기병은 그 기동성과 돌격력을 인정받아 2차대전 초기까지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소형의 권총이나 장총 등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으며 고전적 의미의 기병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소총과 대포 시대의 지휘관에겐, 더 이상 용맹함이라는 덕목은 필요치 않았다.(아니 도리어 개인적으로는 용맹을 버리고 뒤에 설 필요가 있었다.) 시대는 용맹하기 이를데 없는 술트나 뮈라 같은 지휘관보다, 단신에 수학 성적이 우수한 나폴레옹 같은 지휘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우나 여포 같은 맹장이 아니라, 제갈량 같은 문약한 선비가 최일선에서 지휘를 맡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소총과 대포는 병사 개개인에게 들어가는 시간과 돈을 줄여주고, 그 결과 국민군에 이어 정부군의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규모라고 해도 거의 수천 단위에 이르는 부대의 격전에서 ‘일당백’의 전설적인 영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병사 개개인보다는 부대 하나하나가 중시되고 단체가 중시되는 체계로 바뀌게 되었다.



  소총과 대포. 그것은 물론 기존에 비해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힘을 가진 병기이다. 그러나, 그 전술적 의의는 단순히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힘」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볼 때 기존의 권위를 완전히 부셔버리는 혁명적인 역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볼 때 전장은 튼튼한 체격과 강한 힘, 그리고 용기를 가진 전사들의 무대였다. 항우나 여포 같은 장수들이 활약할 때 평범한 농민군은 나설 자리가 없었으며, 화려한 갑주를 갖춘 기사들이 질주할 때 초라한 몰골의 농노들은 뒤에서 응원하는 역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긍지나 자긍심 따위는 눈 씻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전장의 주역이 아니었으며, 앞에 나서는 입장도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그러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500 의군이 -관우, 장비, 유비의 맹활약에 힘입어- 5만 황건적을 물리치는 업적을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전투에서 병사들은 전장의 주역이 되지 못한다. 아니, 어떤 점에서 하나의 말 역할도 하지 못한다.



  기사나 귀족, 사무라이 등은 농노나 농민, 혹은 시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푸른 피」를 타고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과 달리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히고 말타는 훈련을 해 온 그들을, 그리고 고가의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을 「붉은 피」의 대중이 따라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영국의 장궁병의 경우처럼, 궁병으로서 활약하는 방법이 있었겠지만, 에드워드 시대 영국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이 「푸른 피」를 이길만한 훈련을 할 시간은 없었다.


  한 명의 기사가 현대의 전투기 수준의 유지비를 소모하고, 탱크 수준의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평등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궁병에서 시작된 일반인 군대의 활약은 소총과 대포에 이르러 그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푸른 피」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국민군과 정부군은 더 이상 귀족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뽑은(혹은 여러 과정을 거쳐 선발된) 지휘관이 지휘하였고, 전장의 주역은 더 이상 기사도 사무라이도 아닌 평범한 국민들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소총이나 대포만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소총과 대포는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푸른 피」의 몰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민주정의 탄생에 큰 힘을 안겨다 주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푸른 피」만이 그 주역을 차지할 때 진정한 민주정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귀족과 무사들이, 그리고 소규모 용병들 만이 전투에 나설 때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심은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소총과 대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에 있던 민중에게 자신을 수호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다. 전투기 수준의 유지비를 필요로 하는 기병이, 그리고 수대에 걸쳐 명성을 쌓아온 사무라이가 며칠 훈련도 하지 못하고 갑옷조차 변변치 못한 소총병에 의해 쓰러지는 순간, 역사는 변화하게 된 것이다.


  소총과 대포는 전장의 혁신을 가져온 주인공으로 기억될 수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전장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분명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물론 소총이 플라즈마를 발사하고 대포가 이온 탄환을 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총과 대포가 전장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이상, 모든 이들은 그 자신이 이 세계를 수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푸른 피」 만이 힘을 가지는 시대가 아니므로...



(* 참고 - 국민군과 정부군은 비슷한 개념이지만, 한편으로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나 자신의 민족을 바탕으로 한, 다시 말해 지역적인 개념인 방면, 후자는 정치 체계에 바탕을 둔 개념인 것이다.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들이 모였다면 모두 국민군이라 할 수 있지만(넓은 의미에선 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국민군에 속한다.), 정부군은 국가의 지도 체계인 정부에서 필요에 따라서 국민들을 모으고 지휘하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p.s) 판타지 세계에서 마법병의 활용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 일이 있습니다. 판타지 세계에서 강력한 마법사들은 대포에 필적할만한 효과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훈련 만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대포와는 달리 마법사의 훈련에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들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혼자서 성을 무너뜨리는 위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공성 병기보다도 큰 위력은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총이나 대포는 그 위력보다는 대중이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강점을 가지는 병기이니까요.



- 참고 - 


* 파이크맨(Pikeman) - 많은 이들이 파이크맨(Pikeman)을 창병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파이크(Pike)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Spear)과는 완전히 다른 무기이다.

  판타지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창은 개인이 쓰기 좋도록 대개는 자기 키 정도(보통 1.5m) 길이에 지나지 않는 무기이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자랑 거리인 팔랑크스(Phalanx)의 장창을 닮은 파이크는 최소한 5m, 길게는 6m에 이르는 튼튼한 막대에 창날이 달린 것으로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병기라고 할 수 있다.

  들고 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파이크는 개인이 홀로 사용할 수 있는 병기는 아니다. 이는 여러 명의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전투를 벌일 때나 쓰일 수 있는 무기로서 대규모로 운용될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파이크를 앞으로 내밀어 고슴도치 상태가 된 파이크 병은 중기병의 돌격조차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세 기사들의 시대에 종막을 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화포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장궁(Longbow) - 미국이 자랑하는 대전차 헬기의 개량형을 부르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이 병기는, 100년 전쟁 시대 영국군의 주력 병기로서 활용되었다.

  대략 1.8~2m 길이에 이르는 장궁은 통상적인 활에 비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유효 사거리가 230m에 이르는 이 병기는 보관이나 관리, 유지 등이 불편하긴 하였으나 기존의 활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유효 사거리로 먼 거리에서부터 공격이 가능했고, 기사들의 철갑을 간단히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길이가 길고 탄력이 강하여 사용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영국에서는 일찍이 활쏘기를 적극 장려함으로서 대규모 장궁병 부대를 양성할 수 있었고, 주로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던 이 병사들은 귀족이나 영주와는 달리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며 전장을 주름잡았다.

  개전 초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이들은 후일 프랑스에서 국민병을 동원하고 화포를 본격적으로 투입함으로서, -그리고 영국의 정치가 불안해지면서- 차츰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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