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애플사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잡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애플 시리즈를 통해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낳고, 매킨토시로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운영체제 가능성을 보여주고, 아이팟과 아이튠즈로 온라인 음악 시대를 선도하고, 아이폰으로 스마트폰의 미래를 새롭게 개척한 그는 현대의 정보 기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업적 중 많은 것이 다른 이의 발명품을 빌려 왔다는 비판도 있지만, 기술이라는 것이 개발보다는 어떻게 활용되는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없었다면, 적어도 정보 산업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느끼게 합니다.
1664년의 오늘 태어난 영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토머스 뉴커먼은 스티브 잡스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하나의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대장간의 직공이었던 그는 학문도 없고 과학도 몰랐지만,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뉴커먼 기관이라 불리는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증기기관은 상업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제품으로서 광산의 배수 등에 활용되었고, 이후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며 산업 혁명을 낳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편, 오늘은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으로 광학적 에테르 이론을 부정하는 최초의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고 새로운 과학 혁명의 가능성을 이끌어낸 에드워드 몰리와 정보 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샤논의 기일이기도 합니다. 이들 역시 물리학과 정보 공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로 기억되지요.
이들 중 누구 하나가 없었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 문명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토머스 뉴커먼이 아니었다면, 산업혁명이 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며, 스티브 잡스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텍스트 운영 체제를 계속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 스티브 잡스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또는 토머스 뉴커먼이 좀 더 탄탄한 이론으로 뉴커먼 기관을 더 빨리 발명했다면 역시 세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요.
SF의 장르 중 하나인 스팀펑크는 바로 이처럼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세계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증기기관이 극도로 발달하여 승용차를 비롯한 모든 물품의 동력원이 증기기관으로 발전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지요.
스팀펑크는 그 독특한 분위기로 많은 팬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꾸준히 다채로운 작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SF 작품의 폭이 넓지 않은 국내에서조차 <스팀보이>나 <사쿠라 대전>, <쾌걸 증기탐정단>,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같은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국내에서 <네오스팀> 같은 스팀펑크 온라인 게임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추천작은 이 같은 스팀펑크 분위기 작품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내용을 가진, 작품 바로 필립 리브의 <견인도시 연대기>입니다.
<견인도시 연대기>는 여느 스팀펑크 작품과는 달리 과거나 대체 역사가 아닌 먼 훗날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세계는 전쟁으로 황폐해져서 바다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 비행선이 하늘을 수놓고 땅에서는 도적들이 날뛰는 세계에서 이야기는 펼쳐집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세계관은 첫 번째 권인 <모털 엔진>의 초반부 단 한 문장만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하늘은 잔뜩 찌푸린 어느 봄날, 런던 시는 바닷물이 말라 버린 옛 북해를 가로질러 작은 광산 타운을 추격하고 있었다.’
환상적입니다. 런던시가 추격한다? 바닷물이 말라버렸다고? 이처럼 고작 단 한 문장으로 모든 세계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궁금증을 불러오는 작가의 솜씨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문장 그대로 이 세계는 ‘견인도시’라 불리는 이동하는 도시들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큰 전쟁으로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견인 도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자를 약탈하고 도시를 먹어치우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큰 도시는 작은 도시를 먹고 해체하여 자원을 뽑아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시민을 노예로 부리며 살아갑니다.
여기에 견인도시에 반대하는 반견인동맹이 등장하고, 견인도시에서 물건을 훔쳐 살아가는 도적이나, 비행선으로 하늘을 질주하는 수송단, 심지어 공중 도시까지 출현하면서 세계는 한껏 복잡해집니다. 물론 전시대의 유산인 초병기도 빠질 수 없지요. 스토커라 불리는 기계 병사와 도시를 일격에 날려버리는 무기가 이야기를 한껏 흥미롭게 만들어 줍니다.
<견인도시 연대기>는 미야자키 하야호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또는 <미래소년 코난>을 연상케 하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증기기관의 세계는 아니지만, 증기와 스모그가 자욱한 산업혁명 시대의 런던을 떠올리게 하지요. (마침 4권 중 첫 작품의 무대가 ‘런던시’인 것은 그러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이들 작품처럼 필립 리브의 <견인도시 연대기>는 매우 재미있고 쉽게 다가옵니다.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는 듯 페이지가 절로 넘어가고 다음 권을 보고 싶게 만들지요.
혹자는 이 작품을 ‘라이트 노벨’이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주인공들이 소년, 소녀라는 점, 그리고 독특한 세계관과 온갖 개성 넘치는 캐릭터상은 이러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단점이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필립 리브가 그만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줄 뿐이죠. 무엇보다도 일부 라이트노벨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미소녀 캐릭터만을 내세우는 경향은 절대로 없다는 점에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견인도시 연대기>는 ‘청소년 성장 모험물’인 동시에 재난 후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을 충실하게 엮어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입니다. 가볍고 편하게 볼 수 있지만, 그 이야기는 매우 진지하며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연대기라는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부모로부터 자녀로 이어지는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도시가 도시를 사냥하고, 파괴된 땅 위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다채롭게 펼쳐지며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채로운 장르 작품을 보는 이유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