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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

히미코전(火魅子伝)을 통해 살펴본 이세계 모험물

* 많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이세계 난입물(또는 이고깽)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만, 난입이라는 표현은 왠지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것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세계 모험물(異世界冒險物)"('다른 세계 모험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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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기도 했던 히미코전. 사실 이 작품은 "사쿠라 대전", "천외마경" 등으로 유명한 기획자 히로이 오지씨를 중심으로 한 레드 컴퍼니의 '미디어 믹스' 기획 작품입니다.

(* 미디어 믹스 -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로 동시 기획되어 제작되는 작품. 만화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거의 보편적인 사례입니다.)


[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나온 히미코전. 전략 게임으로 구현되었다. (레드컴퍼니) ]


  "천상천하", "에어기어" 등을 그린 오그레이트(大暮維人)씨의 만화와 일러스트, 그리고 "프린세스 미네르바", "강철의 백토끼 기사단" 등의 작가인 마이사카 코우(舞阪洸)씨의 원안(스토리와 설정)을 바탕으로,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책, 그리고 게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매체로 선보인 작품인 것이지요.


  이들 작품은 매체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아니, 아예 다른 작품이라고 보아도 될 듯 하지만) 그 기본 설정은 모두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의 고교생인 쿠타니(九峪)는 여자 친구인 히메지마 히미코(姫島日魅子)와 함께 규슈에 있는 그녀의 조부의 고고학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가 기묘한 형태의 구리거울을 발견하고 거울에 빨려 들어가고 만다.

  거울(보다 정확히는 거울의 정령)의 신비한 힘에 의해 도착한 곳은, 고대 일본의 큐슈를 닮은 세계. 하지만, 독특한 문명과 마법과 같은 힘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세계였다.(말하자면 평행 세계. 3세기의 큐슈와 구별하기 위해 '히미코전의 세계'라고 하자.)

  히미코전의 세계... 규슈. 그곳은 본래 히미코라고 불리는 여왕에 의해서 통치되는 야마타이국(耶麻台国)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혼슈의 강국 쿠네국(狗根国)에 의해 제압되어 압정이 행해지고 있었다.

  쿠타니는 자신을 데려온 거울의 "천마경"의 정령 쿄로부터 이곳이 다른 세계(네가 알고 있는 일본과는 조금 다른 세계)이며, 쿠타니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쿠네국을 물리치고 왕족의 후예 중에서 히미코라는 여왕을 탄생시켜 야마타이국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쿠타니는, 쿄의 제안으로 "신의 사도"로서 행세하며, 구 야마타이국의 사람들과 함께 쿠네국과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 애니메이션에서는 쿠타니와 히미코가 함께 히미코전의 세계로 날아가지만, 게임이나 소설에서는 히미코를 대신하여 쿠타니 혼자만 오게 된다.)


  히미코전의 세계는 방술이라고 불리는 마법과 같은 힘이 존재하고, 마계의 주인인 요괴들이 등장하는 세계... 한편으로 나무로 만든 전차들이 굴러다니고, 글라이더 같은 날틀로 하늘을 날며, 심지어는 거대한 섬이 공중에 떠 있는 세계입니다.

(이런 모든 기술들은 선주 문명의 유산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틀란티스 같은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세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 방술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비공정. 전략의 폭을 넓혀주긴 해도 여러가지 제약으로 무적 병기는 되지 못한다. (히미코전 / 후지미 출판) ]


  마계, 그리고 천계(를 비롯한 5천)라는 존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는 세계... 하지만, 주인공인 쿠타니는 그 어떤 특별한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눈길을 끕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천마경의 정령인 쿄는 자신의 모습을 남들 앞에 드러내어 쿠타니를 '신의 사도'라고 믿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 외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습니다.(그냥 거울의 힘으로 히미코 후보(왕족의 후예)를 찾아내고, 쿠타니의 간식을 슬쩍 하는 정도.) 방술의 힘도, 소드 마스터의 능력도... 쿠타니에겐 새롭게 부여되지 않았지요.

  주역인 쿠타니는 전직 용병 출신도 아니고, 무예의 달인도 아니며, 젊어서 MIT를 졸업한 천재도 압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고교생... 단지 삼국지나 대망 같은 역사 소설과 모 회사의 역사 전략 게임을 좋아하고 , 다소 밝힘증이 있는 남학생.(오죽하면 극중에서도 '쿠타니님 또 야한 생각하고 있군'이라는 대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

  당연히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울 수도 없고 기묘한 힘을 적을 전멸시키지도 못합니다. 여느 이세계 모험물의 주역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라고 보아야 겠지요.

(설사 쿠타니가 전국 검도 챔피언이라고 해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미코전'의 세계 사람들은 죽도를 들고 연습을 한 게 아니라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워온 이들이기 때문이지요. 현대인들이 과거로 갈 경우 유리한 것은 단지 체격 정도... 하지만 실전 경험이나 '각오' 같은 것을 생각하면, 스페츠나즈나 그린베레라고 해도 정면에서 중세의 기사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 사도'라는 믿음은 그에게 주역이 될 수 있는(지휘관이 되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제공하고, 그는 나름대로 미래(현대)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쿠네국과의 전쟁을 이끌어나갑니다.


  애니메이션보다는 소설(21권까지 발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이세계 모험물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요건은 충실하게 갖고 있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펼쳐나간다는 점에서 말이죠.


  흔히 이세계 모험물이라고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진 누군가를 주역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죠. 만일 여러분이 난생 처음 보는 세계에 떨어진다면?(가령 "중간계"라던가, "로도스 섬" 같은 판타지 세계라도 좋고 "고구려의 평양성"이나 "신라의 서라벌", 혹은 징기스칸의 막사라도 좋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요?


  사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는 여러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그 세계에서는 매우 무력한 존재이니까요. (크게 양보해서 말이 통한다고 해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믿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세계 모험물의 고전인 "아서왕과 양키"에서도 마침 일식이 일어나는 것을 기억하고 이를 이용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상당히 억지스럽기는 해도 최소한 '나는 신의 사자'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이세계 모험물의 주역들은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뭔가 할 수 있는 자격(또는 능력)'을 얻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장면에서 가장 쉽게 거론되는 것은 역시 '전설'이나 '신화'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판타지의 분위기를 풍기는 고대 세계에서는 그 '신화'의 힘이 매우 크기 때문이지요. 요즘 세상에서 '신의 사도'가 어쩌고 해봐야 안 통하겠지만 그 세계는 다릅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세계의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뭔가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단지 '하늘에서 떨어졌기 때문' 같은 조건으로는 왠지 지나치게 우연성이 강하고 '신기'라던가 '보물' 같은 증거품 정도는 필요할 것입니다.


  "히미코 전"에서 쿠타니가 '신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야마타이국의 신기(神器)인 천마경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마경에서 -오직 여왕 만이 불러낼 수 있다는- 정령 쿄를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12국기"에서 료코가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정한다는 기린이 그녀를 데려왔으며 그녀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왕 만이 뽑을 수 있는 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A군(17)의 전쟁"에선 주인공 역시 '대대로 마왕은 다른 세계에서 온다.'는 전설(사실)이 존재하며, 전대 마왕이 인정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세계를 넘어오면서 무언가 독특한 힘이나 외모를 갖게 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천공의 세계 엘하자드. 독특한 재미를 가진 이세계 모험물이다. (AIC) ]


  가장 대표적인 것은 AIC의 애니메이션 "엘하자드"로 여기의 주인공인 마코토는 우선, 로슈타리아의 둘째 공주(파트라)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대 엘하자드 문명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가 신의 사도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특수한 능력이라는 것에는 물론, 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갖고 가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리 퍼넬의 "용병"이라는 소설에서, 외계인에 의해 고대 지구와 같은 세계(트란)에 도착하게 된 주인공들은 그들이 '스타웨폰'이라고 부르는 화약 병기를 통해서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였고, 신화 속의 존재로서 힘을 얻게 됩니다. 물론, 이 세계에서 그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타맨"이라는 존재가 트란 세계의 전설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총 한자루로 신으로 군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전설과 신화의 세계인 고대 야마타이국을 무대로, '천마경'에게 인정받은 주인공이라는 쿠타니의 입장은 매우 자연스럽고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쿠타니라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상황도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작품 "히미코전"에서는 그 부분을 쿠타니의 여자 친구인 히미코가 본래 '히미코전 세계'의 일원으로서 천마경과 호응하는 고대의 방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쿠네국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과거에 잃어버린 천마경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지요. 그리하여 천마경의 힘은 히미코를 데려가려 했는데 그녀를 구하려던 쿠타니가 대신 말려 들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등장과 그 세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은 주인공이 그 세계에서 활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요건에 해당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그 세계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고(적어도 간단한 의사 소통은 되어야 하고), 뭔가 독특한 상황에서 중요한 누군가를 구해내거나 그와 만날 것. 또는 전설이나 신화 속의 어떤 존재로서 받아들여 질 것...


  이러한 조건을 통과하게 되면 비로서 '이세계 모험물의 주역'으로서 그 세계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데... 히미코전의 쿠타니는 앞서 말한 여러가지 요건으로 인해 충분한 자격을 받게 됩니다.

(* 이른바 '이세계 난입물'이라면서 천시되는 작품들은, 이렇듯 자연스러운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고, 무작정 '신과 같은 힘'을 줌으로서 내용을 엉망으로 만들곤 한다. 그리하여 '투명 드래곤급'으로 강력하다는 것 외에는 뭔가 내세울게 없는 주역이 날뛰는 '난입물'이 되어 버리고, 이른바 쓰레기 취급을 받고 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고작 검도 챔피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주역이 '소드 마스터'급의 능력을 갖고 활약하게 되는 것. 현대 세계에서 죽도나 휘두르던 소년이 그야말로 생사를 다투는 싸움을 경험한 사람들을 상대로 뭔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세계에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세계 모험물의 주역으로서 더욱 중요한것. 그것은 주역이 자신에게 놓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하자드의 마코토처럼 뭔가의 능력이라도 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러한 능력은 그다지 큰 도움이 않게 마련입니다.(그보다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도록 설정한다. 만일 엄청난 능력이 주어진다면, 이미 '먼치킨 작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 자체보다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은 요소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고 보다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뭔가의 상식, 혹은 뭔가의 기술, 또는 발상으로서 상황을 해쳐나가는 것이 마치 "맥가이버"를 보는 듯 눈길을 끄는 것이지요.


  "12국기"에서 여왕이 된 료코가 나름대로 알고 있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 없었던 '국제 협력 체제'라는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나, "A군(17)의 전쟁"에서 A군(^^)이 철조망으로 적의 진격을 막아내고 드래곤을 공중 요새처럼 이용하는 발상... 그리고 "엘하자드"에서 악역인 진나이가 정정당당한 대결 밖에 모르던 바그롬에게 자신만의 '비겁함'을 가르쳐 싸우게 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군사학에 뛰어난 장교나 각종 학문을 알고 있는 학자가 되겠지만("용병"의 주역인 릭 갤러웨이 대위의 경우 전쟁의 역사를 바탕으로 파이크병을 훈련시키고 궁병과 함께 밀집 배치하여 '로마군'을 격파합니다. 소총은 단 한방도 쏘지 않고...) 때로는 평범한 고교생이라도 그 세계에서는 없는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고교생은 고교생... 알고 있는 지식이나 쓸 수 있는 책략에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미코전"의 쿠타니는 어떻게 그런 상황을 헤쳐나갈까요? 바로 여기에서 그는 '삼국지 같은 역사 소설을 좋아한다.'는 설정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노인에게는 삼국지를 보이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삼국지 속에 수많은 계략들이 그렇지 않아도 영명한 노인들을 더욱 교활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흔히 판타지 세계 같은 것을 묘사할 때 우리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세계, 각종 계략과 책략이 판치는 세상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대는 -설사 전쟁 중인 시대라도- 우리 세계의 사람들 사는 것에 비하면 순진하기 이를데 없는 세계...


  우리 시대처럼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책조차 별로 읽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무래도 '간계'에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직접 경험하거나 간접 체험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눈감으면 코베어가는' 서울에 온 시골 사람 꼴이 될까?)


  그런 면에서 수많은 책략으로 가득한 "삼국지"나 "대망" 같은 역사 소설은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 꽤 훌륭한 응용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김용의 "녹정기"에서도, 후금이 명나라를 침공할 때 사용한 다채로운 계략들이 실은 삼국지의 대목을 이용한 것이라면서, 실제로는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이야기(적벽 대전 등)의 영향을 생각할 때 이야기꾼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히미코전'의 세계 정도라면 보급의 중요성 따위는 무시하는 지휘관이 얼마든지 있겠지요. 병참 체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보급선"의 중요성 하나만 알더라도 꽤 유능한 지휘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은 아군이, 그리고 적군이 순진할수록 커지게 마련입니다.


  오직 군사적이거나 정말 실용적인 지식이나 학문 만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혹은 모르는) 모든 것들이 '그 세계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가령, 우리 세계의 제도나 학문, 풍습 외에도 우리 세계의 놀거리나 먹거리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로운 흐름'으로서 다른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니, 꼭 실용적인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쿠타니가 "나이스 아이디어"라는 말을 할 때, 그 세계의 다른 이들은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쿠타니는 이런 말을 하고 나서는 항상 설명을 붙여주기 때문에("나이스 아이디어 그러니까 좋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야마타이국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이스 아이디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왜 '나이스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세계의 인간인 쿠타니에 맞추어...


  이렇듯 자신들이 살아가던 세상과는 다른 독특한 '다른 세계'에 떨어진 주역들은 필요한 활약을 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갑니다.

  바로, 그들 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통해서...


  이세계 모험물과 난입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단순히 세계를 넘어 가면서 우연히 투명드래곤급의 힘을 얻어서 활약하는 내용이라면, 굳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그 세계에 있던 누군가(왕자건 농부건 상관없다)가 어느날 갑자기 번개를 맞아서 초능력에 눈을 떴다고 해도 되겠지요.


  "이세계 모험물"에 굳이 다른 세계의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에 새로운 인자... 새로운 피를 불어 넣음으로서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모습을 즐기기 위함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피"라는 요소에 먼치킨 급의 파워는 필요치 않고, 단지 그 세계와 우리 세계의 "차이"를 충실히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세계(우리 세계?)에서 찾아온 주역들을 통해서 우리와는 다른 그 세계만의 모습을 이해하고 체험하는데도 도움을 주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왠지 미소녀 하렘물로 보이는 "히미코전"은 바로 그런 새로운 흐름의 요소를 충분히 살린 "이세계 모험물"이며,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입니다.

  투명한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변화되어 가는 세계... -다른 많은 이세계 모험물이 그렇듯- "히미코 전"은 바로 그런 것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이세계 모험물은 단순한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또는 왕따 당하는?)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고, 난데없이 먼치킨 적인 힘을 손에 넣어 싸우는 것은 이세계 모험물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난입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의 '다름'을 인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가져오는 가능성을 살피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이세계 모험물의 진정한 의미이자 특성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사실 국내의 많은 '이세계물'은 모험물이 아닌 난입물이고 그만큼 가치가 퇴색되는 것입니다.



여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은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외전 포함- 21권이나 발매된 소설을 단순히 미소녀들로 가득한 하렘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이세계 모험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신의 사도'라는 이름으로 이세계 모험물의 전형적인 패턴을 답습하고, 수많은 미소녀 캐릭터(히미코 후보만 6명이 있고,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수 십 명 존재한다. -> 1999년에 발매된 게임에서는 현대 세계의 히미코에 히미코 후보, 그리고 연인 후보 9명을 추가하여 16명의 히로인이 등장하고 모두 다른 성우를 써서 "사쿠라 대전"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를 내세워 하렘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싸구려 '이계 난입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점에서 이 작품은 꽤 괜찮은 작품이지요.

  물론, 애니메이션은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만화책은 서장 일부 만으로 끝나는 등 부침이 심한 '기획'이긴 하지만.(개인적으로 게임은 꽤 재미있게 했습니다. "사쿠라 대전"처럼 PC용으로도 나오면 좋을텐데요.)

  문제는 2부까지 총 21권이 나왔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거죠. 3부는 과연 나올 수 있을지 어떨지...


(* 네이버 블로그에서 옮겨서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