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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야기/오늘의 추천SF

(오늘의 추천작)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火の鳥), 생명의 본질과 인간의 업을 그려낸, 만화의 신 일생의 역작


  오늘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발견된 날입니다. 이로써 생명의 본질에 대하여 한 발짝 더 접근하고 새로운 눈으로 생태계와 세상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본질, 그리고 세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면, 한 작품이 떠오릅니다. 바로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입니다. 마침 1981년의 오늘 일본에서 발사된 X선 관측 위성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히노토리(불새)'라고 짓기도 했지요. 이에 대해 데즈카 오사무는 이 위성과 관련한 간행물에 직접 일러스트를 제작하여 제공했습니다만...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는 그의 작품 중 최대의 역작 중 하나입니다. 그가 만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만년까지 계속 손을 댔던 작품으로, 그의 ‘일생의 작업(라이프 워크)’이라고도 불리지만, 안타깝게도 완성하지 못하고 만 작품이지요.

  고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일본만이 아니라 지구나 우주를 무대로 생명의 본질과 인류의 업, 그리고 사랑 등을 그려낸 작품으로, 데즈카 오사무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근거로 장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불새의 연재는 1954년에 ‘여명편’으로 시작됩니다. 그가 데뷔한 것이 1946년이니 데뷔하고 8년 뒤의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 전부터 작업을 꾸준히 해온 결과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명편’은 출판사의 도산으로 미완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 편’, ‘그리스편’, ‘로마편’ 등을 각각 연재했지만, 연재하던 잡지가 계속 폐간되거나 휴간되는 일로 인해서 당시엔 ‘이 작품을 연재하면 폐간된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인 ‘불새’에 관련된 주인공들이 이들이 대부분 다투고 괴로워하며 결국 불행해 지는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본래 이 작품은 <철완 아톰> 같은 여러 작품과 연결되어 그의 작품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완성할 예정이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작가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도 참 안타까운 작품이지만, 완성되어 나온 내용만으로도 그 거대한 세계관과 깊이 있는 사상에 감동하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소녀편을 포함 17권이 소개되었습니다.)

  작가의 ‘일생의 작업’이라는 평가 그대로 그의 사상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판타지로부터 SF에 이르는 다채로운 장르를 오가며 고대와 현대, 미래 등 다양한 시간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 액션에서부터 순정만화, 성인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였고 주제나 내용도 다채롭기 이를데 없는 데즈카 오사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인지를 초월한 초 생명체이자, 그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불리는 불새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서양의 피닉스, 동양의 봉황 등을 모두 포함한 존재로서 시공을 넘어 세상을 오가며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존재인 불새는 고대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수많은 시대에 모습을 드러내며 인간의 운명에 관여합니다.
  불새를 발견한 이들은 때로는 영생을 얻고자 때로는 권력이나 야망을 위해서, 그리고 때로는 지식을 위해 불새를 쫓고 제각기 자신들의 운명과 마주합니다.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고 문명이 흐트러지고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죽어가는 다양한 일들이 불새라는 존재와 엮여서 펼쳐지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불새는 여러 SF 작품에 등장하는 정신 생명체이며 우주 생명으로 형성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SF이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채로운 상황으로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데즈카 오사무의 여러 작품이 그렇듯 매우 밀도가 높습니다. 이를테면 1권으로 된 ‘철완 아톰 지상 최강의 로봇편’이 10권짜리 ‘플루토’로 완성된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가 밀도가 낮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컷 한 컷,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서 많은 이야기와 생각이 담겨 있기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많은 작가들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정도이지요. 한 권, 한 권, 각각의 이야기마다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에 충분한 규모를 갖고 있으니까요. 각 이야기마다 배경과 내용이 완전히 다르며 하나하나가 완성된 이야기로서 중간에 하나만 뽑아 보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실사 영화로도 완성되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중에는 원작에는 없는(데즈카 오사무가 구상하긴 했지만, 만화로는 완성되지 않는) “불새 2772 사랑의 코스모존”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영상화된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기도 합니다.
  2004년에 NHK에서 방영한 13편까지 TV 애니메이션은 마지막으로 제작된 “불새 우주편” OVA 이래 거의 20여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안타깝게도 이들을 모두 모아도 연재 작품을 모두 담지는 못합니다.

  데즈카 오사무가 떠나버린 지금 ‘불새’의 완성된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붓다”처럼 극장판 규모로 ‘불새’의, 집필된 모든 에피소드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여담) 제가 ‘불새’라는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코나미에서 만든 게임을 통해서였습니다. ‘불새 봉황편’의 미디어믹스 기획으로 진행된 작품으로, 봉황편의 주인공 중 하나인 가오우(我王)의 이야기를 담은 액션 게임이었죠.
  MSX2용으로 나왔기에 게임은 해 보지 못했고, 게임 공략에서 짧은 배경 이야기만을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이야기에 감동하여 꼭 해보고 싶었던 게임이죠. 코나미의 여러 게임처럼 음악이 참 좋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게임은 배경 이야기만 원작에 따왔을 뿐 내용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지요. 게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곳에 아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차별과 박해를 받은 아왕은 도적이 되어 살인 방화 등을 저지르며 생활했지만, 어느 날 한 여성과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작은 오해로 아왕은 그녀를 살해해 버리고 만다. 그녀의 시체는 작은 무당벌레로 변해버렸다. 그녀는 이전에 아왕이 구해준 무당벌레의 화신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죄를 깨우친 아왕은 죄를 참회하고자 불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신성한 불새의 조각을 새겼는데 완성된 조각은 누군가에게 빼앗겨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여러 시대에 흩어지고 만다. 이에 아왕은 조각을 되찾고자 시공을 넘어선 모험에 떠난다.)

(왠지 봉황편의 이야기를 보면, 스즈에 미우치의 ‘유리가면’ 중 ‘홍천녀’ 부분이 떠오릅니다. 이 역시 ‘불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일지도 모르죠.)

추가 : 코나미의 "불새 봉황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