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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야기

로봇과 인간. 로봇을 인간이라 부르는 가능성의 문제

만화 [공각기동대]에서는 인형사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서 자신이 생명체라면서 망명을 주장합니다.



[ 자신을 생명체라 주장하는 프로그램 인형사. 여기에는 많은 고민이 존재한다. (공각기동대 / 프로덕션 IG ) ]


두뇌마저도 상당 부분을 기계로 바꾸는 전뇌화가 진행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이 로봇과 다른 것을 '고스트'라고 불리는 일종의 영혼이라고 설정하고 있는데(굳이 말하자면 '인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형사는 자신에게 고스트가 있으며 이 탓에 인간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는 뇌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신이 기계이며, 때때로 로봇의 몸을 조종해서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자면 생체 조직이 없다고 해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겠지요.

한편, [AD 폴리스](버블검 크라이시스)에서는 부머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도 몸의 많은 부분을 기계화한 사이보그들이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는 몸에서 기계화된 부분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인간과 부머를 구분합니다. AD 폴리스라는 조직은 인간이 아닌 부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찰 조직이고, 이들이 출동한다는 것은 상대를 부머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지요.

여기에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본래 인간이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몸의 많은 부분을 기계로 바꿉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인간적인 몸'에 질투심을 느껴 지하철에서 홀로 있는 여성을 살해하는 연속 살인자로 활동하지요. 그런 그녀는 결국 '부머'로 분류되어 AD 폴리스에게 사살(파괴)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 인간으로서의 신체를 질투하여 살인을 자행하고 인간이 아닌 '부머'로서 파괴된 여성. 이처럼 사이보그화된 세계에서 인간과 기계의 구분은 매우 어렵다. ( AD 폴리스 / AIC ) ]


한편 [로보캅]에서 주인공인 머피는 몸의 많은 부분이 기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프로그램에 의해 행동을 제약받기도 합니다. 로보캅을 만든 회사의 직원은 공격할 수 없다는 제약이죠. 이 작품 속의 악당은 '해고'됨으로써 이 제약에 관계없이 사살되지만, 만약에 그게 해고되지 않았다면 로보캅(머피)은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묵인해야만 하는 현실에 처하지요. 하지만 그는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에게 '로보캅'이 아닌 '머피'라고 대답합니다. 여하튼 그 자신은 로봇이 아닌 인간 머피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품에 따라 인간과 로봇을 나누는 기준은 굉장히 다르며 또한 그들 자신이 인간이나 로봇이라 인식하는 기준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로봇이라고 불러도 '나는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며(공각기동대식으로 말하면 ‘고스트가 있고’) 인간처럼 음식을 먹고 생리 작용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로봇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그것)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그를 인간이라고 인정할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원작의 [바이센테니얼맨(200살을 맞은 사나이)]에서는 한 로봇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장기를 하나 둘 생체 조직으로 바꾸었고 '나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그가 로봇인지 인간인지에 대해 재판장은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로봇은 인정해도 영원히 사는 인간은 인정하지 않는다."라며 그가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200살을 맞은 인간'으로서 인정받게 됩니다.

[ 200살을 맞은 사나이. 한 로봇을 인간이라 부르는가는 사실 사회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콜롬비아 픽쳐스) ]

어떤 존재를 인간으로 구분하는가 로봇으로 구분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심리나 사회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법적인 문제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가령 로봇이 아닌 인간이라면 '인권'이 주어져야 하니까요. (물론 인간으로서의 의무도 주어져야 합니다.)

우선은 그를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것의 소유주로부터 ‘재산’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법적으로 그를 '인간'이라고 인정한다면, 주인은 그를 '인간'으로 대해야 하며 급료를 지불하고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의 대다수 나라에서 '노예제도'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이센테니얼맨]에서는 로봇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하고 재판을 거쳐 로봇이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런 법적인 문제는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등장하는 로봇의 주인이 만일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편 주인이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그것)를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그를 '인간'으로서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세금을 낸다거나,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의무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누군가가 그를 파괴(살해)했을때 그것이 '로봇'이라면 단순히 재물손괴죄가 되지만, 그가 인간이라면 살인죄가 적용됩니다. 그것이 누군가를 해쳤을 때 '로봇'이라면 사고가 되지만, '인간'이라면 상해, 또는 살인이지요. 사고라면 그것을 만들고 정비하고 관리하거나 소유한 사람의 책임이지만, 인간이라면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AD 폴리스]의 이야기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부머 여성은 결국 '살인'이 아니라 '상해사고'일 뿐이고, AD 폴리스가 그를 파괴한 것은 고장난 기계를 파괴하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것이 한 개체(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로봇을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와 유사한 모든 로봇을 ‘인간’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면 그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발급해 주어야 하며 그 밖에도 수많은 행정 처리가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무언가를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그것의 기능이나 특성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명칭의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의 여러 가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등의 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본래 재산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나라에서 동물도 유산을 상속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완동물인 개나 고양이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일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생명체이며 수명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로봇에게는 수명이 없습니다. 애완동물이 죽는다면 설사 그 자손이 재산을 물려받는다고 해도 상속세 등 여러 가지 요건으로 인해 재산은 사회로 꾸준히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바이센테니얼맨]에서 제시되었던 문제는 ‘영원히 사는 인간에 대한 사회적인 질투’도 있었겠지만, 이 같은 재산의 사회 환원 문제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하튼 재산을 계속 갖고 있으면 점차 늘어나게 마련이고, 로봇의 재산은 그야말로 영원히 늘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됩니다.


행성 개조가 진행된 화성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아미테이지 서드]에서는 인간처럼 창조적인 두뇌 기능을 갖고 있으며, 임신을 할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합니다. 인간처럼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등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화성에서 임신 가능성이 떨어짐으로써 출산율이 낮은 것에 대해 고민한 화성 정부의 프로젝트로서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구 정부와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 사회였던 지구 정부(다시 말해 지구의 여성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고 싶지 않았던 화성 정부는 이 사실을 묻어버리고자 그들의 파괴에 나섭니다.


[ 아미테이지 더 서드에서는 결국 사회적인 공인보다도 그들 자신이 행복한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아미테이지 더 서드 / AIC ) ]

이것이 화성 정부의 프로젝트라는 것이 감추어진 채, 서드 로봇은 화성 정부가 보낸 암살자(파괴 로봇)에 의해 하나 둘 처단되고 심지어는 그 명단이 공개되어 대중에 의해 파괴되기에 이릅니다.

주인공과 함께 이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이자, 서드 로봇 중 마지막으로 남은 개체인 아미테이지는 후반에서 주인공과 맺어지게 되지요. 그때 그녀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나는 로봇인데”, 이에 대해 주인공은 “나도 절반은 기계야.”라고 대답하지요.

끝 부분에서 아미테이지에게 주인공은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신분증을 내어주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버려버립니다. 그리고 네트워크 속으로 서드의 동료(의 의식)을 만나러 가자는 주인공의 말에 그녀는 ‘나중에, 셋이서.’라고 답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녀에게는 사회적인 신분보다도 그녀 자신의 몸에 생긴 새로운 생명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고 기뻤던 것이지요.


로봇을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는가는 물론 사회 체제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고민해야 할 사항입니다. 하지만 그들 개체로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는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가가 아닐까요?

현대 사회에선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지만 기실 애완동물이나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훗날 로봇이 기계가 아닌 생명체, 그리고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들 자신에게는 차라리 로봇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가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이 처형되기 전에 '자유!'를 외치듯, "노예로서 편안히 사느니 자유인으로서 죽겠다."라는 상황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그가 자유의지로 '자유'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자유로운 의지로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 로봇과 인간의 구분보다도 소중하고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센테니얼맨]에서 주인공 로봇이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죽음을 선택했듯이, 만화 [내 사랑 마리]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그리고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로봇이 자신의 모델이었던 여성과 맺어지게 된 주인공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거야. 나중에 늙고 추해지면..."

하지만 그것이 단지 질투의 심정이라는 것을 그녀의 다음 말에서 느끼게 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리는 영원히 살고 튼튼하고 병도 걸리지 않는 로봇을 부러워하겠지만, 그들 로봇은 우리 인간을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기계 몸을 갖게 된 여성이 인간의 몸을 질투한 나머지 살인을 저지르듯이 기계 몸의 젊음과 영생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로봇과 인간의 이야기가 SF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요? 우리들 자신이 '진정한 행복의 모습'을 생각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