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심지어 위키백과에도 정보가 없는) 웨스 볼(Wes Ball) 감독이 제작한 영화, "메이즈 러너"는 매우 이례적인 작품입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하지만 국내에선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한) 제임스 대시너(James Dashner)의 청소년 포스트 아포칼립스 3부작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작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감독에서부터 각본, 심지어 배우들까지 그다지 유명한 이들을 찾기 어려운데다, 작품 자체가 할리우드 대작 스타일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처음부터 3부작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고 할만한 연출과 결말을 보여줍니다. "메이즈 러너"에서 보여주는 거대한 미궁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으며, 그 뒤에는 앞으로 2개의 영화를 더 보아야만 알 수 있을, 수많은 음모와 복잡한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불친절한 영화의 대표격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 신인이라는게 너무 티나는 젊은, 웨스볼 감독. 흥미로운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시작하여 멋진 연출을 보여준다. ]
하지만 -3류 액션물 다작 감독인 우베 볼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인, 웨스 볼 감독은 자칫 좌초하기 쉬운 함정 투성이의 영화를 상당히 멋지게 연출하여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해 줍니다.
똑같이 미궁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 "큐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세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탈출극도 꽤 흥미롭고, 여기에 한국 출신의 배우 이기홍(민호 역)을 비롯한, -영화계에선 유명하지 않아도- 역량이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겹쳐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해줍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3부작의 서막'으로서 적절한 작품이라고 하겠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장점으로 가득차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도 -"메이즈 러너"란 이름에 어울릴만한- 미궁다운 '함정'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3부작 소설이 원작'이라는 점 때문에 말입니다.
[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주인공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
영화의 시작은 매우 갑작스럽습니다. 주인공은 기묘한 엘리베이터에 태워진채 이상한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얼떨떨한 주인공에게 그곳의 지도자란 청년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것 저것 알려주지만,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주인공에게 있어 모든 것이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주변을 거대한 벽이 둘러싼 공간.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 있는 그곳은 매우 이색적이었지만,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미궁(Maze)이라 불리는 장소로 연결되는 통로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긴장이 밀려오고 주인공의 삶은 갑작스럽게 변모하게 됩니다.
왜, 어째서인지 모른채 모든 것을 잃고 이 곳에 모여든 청년들. 그 중의 하나였던, 그러나 그의 도착과 함께 모든게 변해가는 계기가 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알력이 생겨나고 그들은 '미궁'이라는 안락했던(그러나 예상치 못한)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도전에 뛰어듭니다...
[ 미궁 속을 뛰어라, 메이즈 러너? 러닝 게임은 아닙니다. ]
"메이즈 러너"는 정체불명의 미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품인 동시에,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미래의 모습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중심으로 한 3부작의 첫 작품입니다. 문명의 붕괴란 상황을 상상하면 느낄 수 있는 무너진 빌딩이나 파괴된 대지 등은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미궁'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참 독특하면서도 약간의 배신감을 안겨주지요.
바로 "이 같은 거대한 미궁은 3부작 전체에서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처음부터 3부작이라는 것을 알고 접근하지 않는 이상.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은 참으로 실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고 -소설의 뒷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마지막에 밝혀진 반전조차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죠.
작품의 주역인 토머스의 기억은 돌아왔지만, 그조차 진실인지 알 수 없고, 다른 이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은 채 영화는 허망하게 종결됩니다. 거대한 미궁을 뒤로 하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의 허무한 감정이 관객들에게까지 전염될 정도죠.
그만큼 속편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3부작의 서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단지 배신감만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첫번째 함정이죠.
두번째로 이 작품은, 예고편과 달리 액션 영화가 아닙니다. 액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미궁이라는 존재와 그 뒤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퀴즈풀이적인 성격이 더 강합니다. 정체불명의 괴물이 등장하여 주인공들을 위협하고, 나름대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간의 갈등은 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액션과 스릴이 눈길을 끌지 못하죠. 그리버란 괴물과의 싸움조차 순식간에 진행되어 끝나버리니까요. 블록버스터급 예고편을 통해 액션을 기대한 이들이 실망할 수 있다는게 두번째 함정입니다.
[ 블록버스터급에 어울리는 강렬한 예고편. 실제 영화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
세번째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너무도 순수합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모인 집단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죠. "파리대왕"은 고사하고 "15소년 표류기"보다도 건전하고 평화로우니까요. 지도자라고 했던 알비(아블 아민)조차 이질적인 주인공을 편하게 받아들이며, 뭔가 과묵하고 화끈한 분위기를 풍기던 민호(이기홍)는 단 하루 밤의 모험 끝에 토머스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죠. 어리면서도 순진한 척은 단번에 토머스의 열성팬이 되어 그를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을 느낌입니다. 죽어가는 알비를 대신하여 지도자가 된 뉴트 역시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오직 미궁에 머물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고집을 부리는 갤리(윌 폴터)만이 적대자로 나올 뿐입니다. 그나마 그에게 동조하는 동료가 거의 없어 큰 위협이 되지 않죠. 그만큼 캐릭터들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등장한 유일한 여성 트리사(카야 스코델라리오)는 거의 배경이나 다를 바 없죠. 주요인물들은 분명 모두 매력적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건 주인공 토머스 뿐... 그것이 세번째 함정일 겁니다.
그 때문인지 이 작품은 지나치게 객관적인 시점으로 보여집니다. 미국 최초로 파노라믹 포맷(한국의 "스크린 X"처럼 극장의 전면 만이 아니라 좌우면도 동시에 써서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상영하는 "메이즈 러너"는 관객들이 경치를 구경하듯 영화를 보게 해 줍니다. 미궁 안이 아니라 미궁 밖에서 실험 동물을 구경하는 느낌일까요? 거대한 미궁은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액션이나 스릴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는게 아쉽죠.
[ 파노라믹 포맷의 사례. 한국의 CJ와 카이스트가 공동 개발한 스크린 X처럼 3면을 활용하지만, 포맷이 달라 호환되지 않는다. ]
하지만 조금만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이 결코 함정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허무한듯 느껴지는 결말은 이 작품이 3부작 소설의 서장으로, "호비트"에 비교하면, 첫편인 "뜻밖의 여정"에 해당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결말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속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죠.
더욱이 2번째 작품인 "스코치 트라이얼"(Scorch Trial)의 무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보여줄 대도시의 폐허 속 공간. 동시에 "큐브" 같은 짜임새있는 미로의 분위기도 충실하게 엮어주겠지요.(2편에선 우리나라에서도 파노라믹 포맷이나 스크린 X로 3면으로 즐길 수 있을까요?)
[ 시리즈의 두번째인 스코치 트라이얼. 메이즈 러너완 또 다른 분위기가 긴장을 더한다. ]
적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역시 3부작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악당인 "위키드"는 자신들의 모습을 감춘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토머스를 제외하면 모두 기억을 잃고 있으니까요. (토머스조차 별로 많은 걸 알고 있지 못합니다.)
http://www.wckdisgood.com/ - "위키드는 좋은 일을 하는거야."란 이름의 사이트. 위키드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관객은 그 진실을 알게 되지만, 작품의 특성상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 주인공들은 미궁이라는 거대한 존재와의 싸움 하나만으로도 버거우니 그 이상의 무언가에 도전할 수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정체불명의 괴물 그리버와의 사투, 끊임없이 변해가는 거대한 미궁 속의 도주 장면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액션 스릴러는 아닐지라도 생존을 위해 미궁에 도전하는 소년들의 모습은 뒤에 감추어진 음모를 생각하지 않아도 흥미진진하죠.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착하다는 것은(이를테면, 3년이나 갇혀 지내던 소년들 사이에 한 소녀가 도착했는데도 너무 반응이 담담하다던가...) 사실 그들이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 준주역급 활약을 보여주는 민호. 꽤 순수하면서도 강렬한 인물입니다. ]
그 중 가장 오래된 알비조차 고작 3년. 사회와 완전히 격리되어 그들끼리 살아온 소년들은 사실상 3살짜리 아기나 다름 없는거죠. 그들의 현재 모습이 진정한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도중에 그리버에게 물려(약이 주입되어) 기억을 되찾은 이들의 모습에서 명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버에게 물리면 이상하게 변해버려."라는 척의 말은 그들이 기억을 되찾음으로서 본래의 인격을 되찾게 됨을 잘 알려줍니다. 실제로 처음 물렸던 찰리가 발광하며 주인공을 공격하고, 주인공을 편하게 받아주었던 알비조차 주인공에게 "네가 왜 여기 있냐!"면서 추궁니다.
민호나 뉴트 등 동료들은 토머스가 그들을 잡아가둔 세력과 한 편임을 알면서도 "과거는 사라졌다."라면서 편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만일 기억을 되찾는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토머스가 구해준 알비가 목숨을 걸고 토머스를 도왔듯이, 토머스의 도움을 받은 그들 역시 동료로서 협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에 많은 불안감을 안게 해 줍니다. 아직까지 그들 사이에서는 밝혀지지 않은게 너무 많으니까요.
이런 모든 점을 생각할 때, "메이즈 러너"는 참으로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3부작의 거대한 구상에 어울리는 복잡한 배경,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냄새를 물씬 풍기는 무대, 여기에 매력적인 소년들의 우정과 대립, 그리고 모든 것의 배후에 얽힌 음모 등.
청소년용 소설이 원작이기에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는 피하고 있지만, 판타지 작품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설득력도 충분히 겸비하고 있죠.
무엇보다도 "거대한 미궁의 영상"은 압권입니다. 미국처럼 파노라믹 포맷으로 즐길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영화관에 가서 보시길 권합니다. 그 장면들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으니까요.
이 작품이 "3부작의 서막"인 만큼, 많은 분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있어 이 작품은 속편을 기대하기에 충분할만큼 매력적이었고 재미있었으니까요. 이미 2편의 계약은 되어 있지만, 2편을 제작할지는 미정인 만큼 하루 먼저 개봉하는 한국의 성적도 중요하지요. 그만큼 큰 시장이니까요. 물론 미국의 성적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여담) "메이즈 러너"의 가장 큰 매력은 소년 캐릭터에 있습니다. 주인공 토머스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주요 인물들 역시 참 매력적이거든요. 액션성이 돋보이는 민호나 여린 듯하면서도 적극적인 뉴트, 그리고 순수한 느낌의 척 등 보이즈 러브(BL)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에겐 최고의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그 중 민호가 참 인상적인데, 비록 토머스에게 끌려다니는 듯 하면서도 "러너"의 지도자로서 충실한 활약을 보여줍니다. 이름부터 외모까지 친근한 한국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돋보이는 할리우드 영화는 쉽게 찾기 어렵죠.(누설이지만, 그는 토머스, 뉴트와 함께 3편까지 꾸준히 활약합니다.)
민호 역을 맡은 이기홍씨는 현재 21세의 한국계 미국인으로 영화 출연은 처음인데, 다른 작품에서도 꾸준히 활약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친근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거든요.
한편, 척 역을 맡은 브레이크 쿠퍼는 원작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내가 척 역을 맡고 싶다."라고 감독에게 계속 트윗을 보낸 끝에 발탁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원작을 본 사람들이라면 "얘야 말로 척이야!"라고 외칠 정도로 자연스럽죠.
추신) 이 작품을 감독한 웨스 볼 감독은 본래 단편 애니메이션을 주로 작업했는데, 그 중엔 국내의 SF팬들에게 호평받은 작품, "Ruin"이 있습니다. 본래 웨스 볼은 바로 이 작품을 장편으로 만들고 싶어서 영화사를 찾아갔는데, 마침 "메이즈 러너"를 제작하려 했던 제작자가 본래 내정되었던 감독을 내치고 그를 선택한 것이지요.
이 작품 "Ruin"을 보시면, 그가 "메이즈 러너"의 감독으로 발탁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메이즈 러너"의 외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이니까요.
2년 전에 소개된 이 작품은 국내의 SF 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웨스 볼 감독의 감각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동시에 "메이즈 러너"가 성공해서 속편들이, 그리고 웨스 볼의 또 다른 SF 작품이 선보이길 기대합니다.
추신2) 코엑스에 가면 "메이즈 러너"의 광고를 볼 수 있습니다. 참 멋지게 연출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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