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을 좋아하는 분들께 한 단편 작품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무림 매니아". 80, 90년대에 지나치게 양산되었던 무협 소설들의 문제점을 파고들고 이를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이를테면, 무림 제패를 노리는 사파 조직이 한 명의 청년 영웅과 기연에 의해 모든 것이 망쳐졌던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자, "대영웅말살지계(大英雄末殺之計)"라는 이름으로, 기연을 만날 만한 깊은 계곡을 화약으로 몽땅 막아버리거나(절애봉쇄작전) 전역에 고아원을 세워 복수심을 가질만한 아이들을 관리하고(고아관리작전), 전국의 영재와 기재에게 무림에 대한 나쁜 정서와 혐오감을 심어(영재세뇌작전) 아예 무림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등 계약을 꾸밉니다.
무림의 판도에서 '백리, 독고, 모용, 제갈, 위지' 등 매우 희귀한 성씨가 판치는 상황을 참지못한 이씨들이 모여 만들어진 무적이씨세가(일이-一二).
흑암회, 일월마교, 고루궁의 세 사파 조직(삼사-三邪).
비정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 적을 살육하는 다섯 명의 초강자(오육-五戮).
그리고 구파 일방 중 살아남은 일곱파(칠팔-七捌)
이렇게 '일이삼사오육칠팔'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도망치던 어머니는 사파 조직의 작전으로 기연이 있는 절벽도 찾지 못하고, 도망만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접근을 차단하는 포위망 때문에 지나가던 전대기인이나 은둔 지사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
[ 오지로 떠나는 주인공. 어떤 기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배트맨 비긴즈 / 워너 브라더즈 ) ]
그런 상황에서 사파에 의해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 주인공은 도가 사상과 불교 사상으로 세상의 허무함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매번 기연과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가득한, 게다가 항상 같은 상황과 대사가 반복되는 무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납니다.
그게 그거인 무림 이야기를 너무 들은 나머지 대다수 아이들은 무림 이야기만 나오면 짜증을 내고 심지어는 졸지만, 주인공 만큼은 무림 이야기에 열중합니다. 무림 이야기에 빠져 들어 잠을 자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아이라 하여 매니아(寐怩兒)라 불리게 됩니다.
[ 무협 세계에서 흔히 나오는 절경에 감추어진 신비한 사원. 이들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배트맨 비긴즈 / 워너 브라더즈) ]
사파의 음모(영약제공작전)로 전대기인이나 은거인사들 대부분이 내공이 너무 높아져 좌화해 버린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은거인사에게 무공을 배운 주인공은, 은거 인사의 손녀와 만나서 xxx를 하고 동료들을 모으고 영웅대회에 나가 무림 맹주가 되는 등 활약 끝에 사파의 배후에 있던 신비인과 대결하고 승리...
무협지를 꽤 읽었다는 이들이라면 정말로 웃음이 가득한 패러디 작품입니다. 주인공의 얼굴이 영 아니기 때문에 인피면구로 감추고 있다는 등, 그야말로 무협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꼬집는 연출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꽤 오래전 <마왕의 지침서(원제 : Peter's Evil lord list)>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 일이 있습니다.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5m 앞에서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부하는 표적으로 삼아라."처럼 '마왕에 대한 조언'을 통해서 판타지나 SF 작품 등에 등장하는 악의 군주가 하는 바보 짓을 비꼬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매우 많아서 230개가 넘었고 당시 그런 불만을 느끼던 많은 이가 있었기에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이를 바탕으로 많은 패러디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SF(정확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를 소재로 한 딴죽 작품 "공상비과학대전" 같은 글이 유행을 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디 작품과 여기서 소개한 김유석의 <무림 매니아>가 다른 것은, 앞서 말한 <마왕의 지침서> 같은게, 단순히 해당 작품이나 장르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인 반면, <무림 매니아>는 그야말로 무협을 좋아하고 오랜 기간 숙지했던, 더 정확히는 '무협을 사랑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그런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패러디라면 단순히 비꼬는 것으로 끝내는 사례가 많습니다. 객관적이라고 말하지만, 더 정확히는 냉소적인 태도로 가득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게 가능할리가 있어?"
<공상비과학대전>이나 <마왕의 지침서> 같은 글에는 이처럼 오직 비난 만이 가득합니다.
물론 이런 글은 재미있습니다. 이런 글을 참고로 만들어낸 창작물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미는 대개 피상적인 것에 그치고 맙니다. 개그로 보자면 바보 짓을 해서 얻어맞는 장면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싸구려 코미디.(슬랩스틱 코미디?) 그 이상의 감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재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무림 매니아>는 다릅니다.
이 작품에는 무협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꼬기를 통해 가져오는 웃음만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재미가 함께 녹아있습니다. 단순한 딴죽이 아니라 진정한 패러디 작품으로서의 매력,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협으로서의 재미가 녹아 있습니다. 무협의 코드를 모르면 아무래도 재미가 덜하겠지만, 이야기 구조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개연성이 잘 되어 있고, 억지스러운 점도 거의 없습니다.
진정한 패러디는 단순히 비틀기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적당한 길이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군요.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잠깐 소개해 보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매니아 부부도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의 어느 날 한 명의 청년이
그들을 찾아왔다. 청년은 어릴 적부터 매니아에 대한 무용담을 듣고 자라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청년은 한가지 질문을 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으셨던 비결
이 알고 싶습니다."
"비결이라……"
매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무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
이네. 어릴 적 무림이라면 손가락질 먼저 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
도 나의 애정은 식지 않았던 거야. 그게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세."
(김유석 - 무림매니아 중)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렇게 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이런 상황도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찾아내고 작품으로 옮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하고 싶으신가요?
여담) SF 사상 최고의 패러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 작품은 SF의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코드를 절묘하게 비틀고 뒤집어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전세계 수많은 이에게 사랑받은 것은 단순히 패러디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을 가진 작품으로 충실한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림 매니아" 역시 짧은 단편이 아니라 좀 더 완성된 장편으로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추신) 이 작품은 PC 통신 시절 무림동에서 소개되었고, 이후 김유석님의 스승이자 무협 작가인 금강님께서 문피아에 소개했습니다만, 시스템 문제인지 뒷 부분이 잘려 나갔습니다. 완전히 공개되었던 작품인 만큼 텍스트 파일을 동봉합니다. (이런 류의 무협 단편들이 함께 묶여서 책으로 소개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원문 출처는 하이텔 무림동, 2차 출처는 문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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