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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이야기

동양 판타지? 이제는 다르게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장르 작품이라고 하면 매우 다양한 분류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것은 역시 ‘판타지’라고 부르는 장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재나 내용에 관계없이 이른바 신비한, 환상적인, 공상적인 이야기는 모두 ‘판타지’로 분류하기 때문이지요.


  외국, 특히 판타지의 본고장인 미국이나 영국에서 ‘판타지’라고 하면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등을 중심으로 한 로망 작품들을 가리킵니다. 기원으로 보자면 <아더왕 이야기>나 <베오울프> 등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들은 특정한 인물들의 무용담을 소재로 합니다. 

  이들 이야기에는 서양 세계에서 보편적인 ‘로망(낭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만의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지요. 


  문제는 그 무대가 서양이 아닌 동양의 어딘가인 경우가 되겠군요. 가령 일본에는 전국 시대나 과거를 무대로 요괴들을 물리치는 이야기 등이 매우 많습니다. 서양의 ‘로망 판타지’가 기사들의 무훈담처럼 주역의 활약과 성장을 소재로 삼는 반면, 이들 요괴 퇴치 이야기에서는 그들 요괴과의 이야기에 중점을 둡니다.

  여기에는 또한 동양 만의 정서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양의 로망 판타지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퇴치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지만, 동양의 퇴마 판타지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때로는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생활하는 존재라는 점 같은 것들이...


  대표적으로 중국의 고전 문학 중 하나인 “요재지이”를 보면 여우의 정령, 심지어는 귀신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망 판타지에 대입하자면 오크와 결혼하거나, 코볼트를 가족으로 맞는 것으로 비교해 볼 수 있을까요? (물론, 귀신이나 여우의 정령이 오크나 코볼트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요.^^) 일본에서도 구미호의 정령이 인간과 결혼하여 자손을 낳고 사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하지요.


[ '천녀유혼'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준 요재지이. 이 역시 서양의 판타지와는 다른 느낌의 작품이다. ]


  로망 판타지에도 물론 다른 종족. 이를테면 엘프나 드워프 등과의 결혼 생활, 공존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다른 종족’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귀신이나 여우 정령 등은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 밖에도 기독교적인 전통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판타지가 '창조주', '신'의 존재를 매우 부각하는 반면, 동양의 것들은 그것이 대개는 '신령' 정도로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눈에 띕니다. 서양 판타지의 '신'들은 진정으로 '신'이기 때문에 이야기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지만, 동양 판타지는 이들이 너무도 쉽게 등장하고 심지어는 주인공들에게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신화나 설화, 전설 속의 존재와 인간의 삶이 부드럽게 뒤섞여서 펼쳐지는 동양적인 이야기들은 기사 문학에서 탄생한 서양의 판타지, 특히 로망 판타지와는 차별되는 동양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 역시 최근에는 조금씩 뒤섞이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서양의 판타지물과 동양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소재와 모습, 그리고 내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모두 묶어서 ‘판타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러다 보니 ‘한국적인 소재의 판타지’니 뭐니 하며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구분해서 부른다면 좀 더 이야기하기도 편할 것입니다. 가령 “서유기”나 “요재지이” 일본의 “팔견전”이나 우리나라의 “금오신화” 같은 요괴나 정령이 나오는 이야기를 판타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또는 판타지라고 해도 서양의 로망 판타지와는 구별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가령 현대의 도시를 무대로 한 작품을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라고 부르듯, 동양 판타지(Eastern Fantasy.)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되겠지요.)

[ 금오 신화의 한 장면. 이들 작품은 분명 서양 판타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


  그렇다면 어떤 말이 좋을까요?


  동양 판타지라는 말도 물론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왠지 ‘서양 판타지의 짝퉁’이나 ‘서양 판타지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조금 꺼려집니다.


  “서유기”나 “팔견전”, “금오신화” 같은 작품들, 우리나라의 수많은 설화나 전설은 서양의 판타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동양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모욕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우리네 작품의 갈래를 부르는데 서양의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똑같은 의미라도 ‘연애물’과 ‘로맨스 소설’은 그 말의 분위기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래 전부터 우리가 기이한 이야기들을 담은 작품을 부를 때 사용했던 한자어를 그대로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자말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이들도 있지만, 굳이 버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네 동양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내용으로 한 이야기. 괴이하고 환상적인 색채가 짙은 이야기” 또는 “이상 야릇하고 재미나는 이야기”를 “전기(傳奇)”나 “기담(奇譚)”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실제로 “전기(傳奇)”라는 말은 일본이나 중국의 문학계에서도 쓰이고 있으므로, 받아들이는데도 부담이 없지요. 다만, ‘전기’라는 말은 ‘전기(傳記)’라고 착각할 수 있는 만큼, ‘기담(奇譚)’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들 표현은 좀 더 ‘우리 것’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동양 판타지가 동양적인 색채를 입힌 판타지… 그러니까 한복을 입은 금발 미인이라면이라면 ‘전기’나 ‘기담’은 왠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분위기의 동양 미인들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동양 판타지, 한국 소재의 판타지라고 부르지 말고 이렇게 해 봅시다.


  ‘한국적인 소재의 기담 소설’, 아니면 ‘한국적인 소재의 전기 소설’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좀 더 분위기를 더하고 싶다면 '환상 기담' 정도면 어떨까요?


  이렇게 작품의 갈래를 다르게 부르는 것만으로 <아더왕 이야기>나 <반지의 제왕>에서 시작된 서양풍의 판타지가 아니라 <서유기> 등에서 비롯된 동양적인 이야기, 김시습의 <금오신화> 등에서 흘러나온 우리만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네 것들을 이야기로 펼쳐나가는데도 부담이 덜하겠지요. 용이나 마왕을 물리치러 세상을 떠날 필요도, 사악한 도깨비나 요괴들을 무조건 적으로 맞이해서 싸울 필요도 없으니까요.


(*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가져와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