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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야기

SF라는 무게라고? 그게 반드시 필요할까?

  이번에 네이버 웹 소설 공모전의 최종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약 1달여에 걸쳐 47개 작품을 읽고 그 중 추천작을 골라서 심사위원의 대화를 거쳐 3개의 대상작을 선정... 참 힘들었지만,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상 작품 3개 중 SF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최종 추천작 중에서도 하나도 없었고 최종 심사 후보작 중에서도 거의 없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를 고민하면서 SF라는 이름의 무게에 눌린게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SF, Science Fiction.... 많은 팬이 '과학 소설'이라고 부르는 이름에 질려서 SF 자체에 경기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사실 SF라고 해서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것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공모전에서 '파운데이션'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나 '2001년 야화'나 '프라네테스' 같은 작품을 바란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바란 것은 은하영웅전설이나 마일즈 보르코시건 연대기, 또는 성계 시리즈나 무책임함장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또는 견인도시 연대기나 메트로 시리즈, 메이즈 러너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니면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마이클 크라이튼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이었거든요. 아니면 슈퍼 히어로나 금서목록 같은 초능력물이라도 좋았어요. 물론 이들에 맞먹는 수준을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마추어로서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 우주 무협지라고? 그럼 어때,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 ]


  하지만 그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최종 후보작에도, 최종 후보작에 들지 않은(적어도 제가 본) 작품 중에도...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에는 김상현씨의 '하이어드', 이종호씨의 '피라미드' 정도를 빼면 여러 권의 장편 SF가 거의 없습니다. (이재창씨의 '기시감'도 있군요.) 은하영웅전설처럼 가볍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찾기 힘듭니다.


  오늘 나온 이야기 중에서 '스릴러'와 '미스터리'에서도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SF 기획자들이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또는 스타워즈 같은 작품을 SF가 아니라고 무시하듯, 많은 미스터리 팬이나 기획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이의 작품을 '수준 낮다'라고 얘기하는 것 말이지요.


  조금 이상합니다. 취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수준 낮다'라고 이야기하는 기준은 뭘까요? 마츠모토 세이초나 요코미조 세이조 같은 작가 작품만 미스터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는 미스터리가 아닐까요? 셜록이나 CSI 같은 드라마를 보고, 명탐정 코난 같은 만화나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만화영화를 보고서 '미스터리가 좋아'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요?


  SF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테드 창이나 그렉 이건만 봐야 하고(반드시 봐야 하고?) 아시모프나 하인라인을 모르면 안 되고, 블레이드 러너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만 봐야 하는 걸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마이클 크라이튼, 아니면 스타워즈나 아바타, 어벤져스를 보고 'SF도 재미있네.'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아니,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나 '에반게리온'을 보고 'SF는 뭔가 특이하네.'라고 하면 안 될까요?


  미국이나 일본의 SF 붐은 하드 SF로부터 시작된게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도 펄프 잡지를 열심히 보고, 슈퍼맨 같은 만화책에 빠져들곤 했으며, 고마츠 사쿄나 츠츠이 야스타카도 캡틴 퓨처나 화성의 공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즐겨 보았습니다.



[ 캡틴퓨처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일본에서 더티페어를 낳고, 이게 다시 미국에서 그래픽 노블로 제작된다... ] 


  한국의 1세대 SF 팬들은 아이들용의 '아이디어 문고' 같은 작품을 보고 자라났고, 라이파이나 로보트킹, 20세기 기사단 같은 작품에 열광하며 성장했습니다.


  한국의 SF 현황은 캡틴 퓨처나 벅 로저스가 최신 유행으로 인기 끌던 일본의 195~60년대, 슈퍼맨에 열광하며, E.E.스미스와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가 호평받던 미국의 192~30년대와 비교해서 그다지 나은게 없습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특히 양적으로), 충분하지 못한게 사실입니다.


  최신의 SF 작품을 선호하는 건 좋습니다. 심각하고 진지한 하드 SF를 즐기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드 SF만이 SF고, 그렇지 않으면 SF가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SF&판타지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하드 SF 팬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 않으며, 전체 SF 팬의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드 SF 팬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하드 SF팬 취향의 기획이 넘쳐나지만, SF를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은 SF가 재미있어서, 즐겁고 놀라워서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이트 노벨이건, 스페이스 오페라건, 아니면 만화책이건, 애니메이션이건 상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바타를 보건, 퍼시픽림을 보건, 아니면 스타크래프트를 하건, SF의 재미를 느끼는데는 별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좀 더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SF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바타 같은 3D 영화만이 SF 영화가 아니라, 비카인드 리와인드처럼 쌈마이 스타일로도 SF 영화는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과학 공식이 잔뜩 흘러나오고 양자 역학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하는게 없어도 SF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건, 슈퍼 히어로건, 아니면 거대 로봇과 괴수 이야기건 상관없습니다. 일찍이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철인 28호'로 과학 기술의 양면성을 보여주었고, '고지라'로 과학이 가져오는 재앙과 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테즈카 오사무가 '철완 아톰'으로 로봇과 인간의 공존을 그렸고,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사이보그 009'로 개조 인간의 고뇌를 그렸듯이, 그리고 마츠모토 레이지가 '은하철도999'로 우주 여정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듯이 어떤 이야기이건 SF로서의 과학적 상상력은 충분히 그려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뭔가 심각한 고뇌와 진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좀비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차별이나 사회적인 무관심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레지던트 이블(바이오해저드)'처럼 액션물을 만들어도 좋고, '세계대전 Z'처럼 '어떻게 좀비를 때려 죽일까?'만 연구해도 좋습니다. 주제 의식에 얽매여서 또는 '과학적 상상력'에 집착하여 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습니다.


  SF의 S는 과학의 S이며, SF의 F는 상상의 F입니다. 그리고 둘 중에 F... 즉 '상상'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상상 속의 세계에서 상상속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것에 약간의 과학을 양념으로 치고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면 그것이 SF가 되는 것입니다.



  네이버 웹 소설 공모전에서 다음 번에는 판타지와 SF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 다시 판타지와 SF 공모전을 진행하겠지요. 아니 반드시 네이버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어디에서든 공모전을 하게 될때 즐겁고 재미있는 SF, 유쾌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심각한 얼굴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이 넘쳐나는 얼굴로 볼 수 있는 SF가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3작품 중 최소한 1개는 SF를 선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개 다 SF면 더 좋겠지만, 그건 바라지 못하겠기에...)


  그리고 'SF는 재미있구나. 나도 써 봐야지.'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정말로 다채로운 작품이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하드 SF팬들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 선보이길 바랍니다. 한달에 나오는 SF를 하나 둘 세면서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뭘 골라서 봐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