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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야기

한국의 SF 인기상은 어떻게 뽑아야 할까요?

  저는 한국 SF에서 팬이나 작가, 그리고 시장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안타깝지만, 한국 SF 분야에서는 '전문가 풀'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으며(이걸 제시할만한 협회나 기관도 없습니다만.) 설사 있다고 해도 여기에 등록할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공 기관에서 인정하는 방식을 적용한다면 말이죠.


[ SF 어워드 2015 행사. ]


  그러다보니 심사 위원으로서 항상 똑같은 분을 보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현재 한국 SF 분야에서 이런 쪽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대중이나 관청에서 바라볼 때는 말이죠.


  SF 어워드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항상 같은 분들이 심사를 맡느냐?'

  '왜 다른 SF 작가 같은 분들은 심사를 맡지 않느냐?'

  '왜 SF를 모르는 분들이 심사를 맡느냐?'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대중이나 관청, 아니면 기관에서 생각하는 SF 전문가의 폭이 매우 좁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그 결과 심사는 항상 같은 분들이 맡고, 조금만 심사위원의 폭을 넓히려고 하면 뭔가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SF 어워드처럼 '기성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상은 어떻게 심사하는게 좋을까요?


  이에 대해 생각하기 위하여 저는 미국과 일본의 수상 시스템(물론 중국도 포함)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는 SF에 대한 여러가지 상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상이 매우매우매우 많지만,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1. 미국 : 휴고상, 네뷸러상


2. 일본 : 성운상, SF 대상


3. 중국 : 중국성운상(중국인 성운상), 은하상


  이들 상을 선정하는 기관이나 단체,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의 선정 방식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SF 잡지(과환세계)에서 선정하는 '은하상'을 제외한 여러 상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합니다.



1) 특정 기관, 단체에서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


2) 결선 투표, 또는 결선 심사로 최종 작품 선정



  예를 들어 네뷸러 상은 미국 SFWA(SF 작가 협회)의 협회원들이 투표로 선정합니다. 물론 작가 협회에 속하지 않은 작가 작품도 대상이 됩니다.


   네뷸러상과 비슷한 것이 일본의 SF 대상입니다. 일본 SF 작가 협회의 협회원들이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성운상과 휴고상, 그리고 중국 성운상은 팬투표에 의해서 후보작이 선정됩니다.


  휴고상은 월드콘에 등록한 사람들이 1차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월드콘에 등록할 때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실제로 대회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성운상은 일본의 '팬 그룹 연합회'에 소속된 팬 그룹에서의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중국 성운상도 중국의 팬 투표를 거쳐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이렇듯, 대다수 상은 작가나 팬에 의한 단체 투표로 1차 후보작을 선정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선정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휴고상, 성운상은 모두 월드콘과 일본 SF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팬 투표가 진행됩니다. 각각의 행사는 참가비가 낮지 않습니다.(게스트는 예외) 다시 말해 그만큼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팬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기상'의 성격이 가장 강하게 드러납니다.


  네뷸러상과 일본 SF 대상은 다시금 작가 협회 회원들의 투표로 최종 작품이 선정됩니다. 작가 협회는 보통,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인기상'보다는 '작품상'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물론 본인의 작품에 투표하는 건 금지됩니다.)


  중국 성운상은 뽑힌 후보 중에서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에 의한 선정을 거쳐서 뽑힙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수상 대상이 매우매우매우 많다는 거죠. 이를테면 SF 단체에 수여하는 단체상이라던가, 신인상, 공로상에 특별 공로상이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중국 성운상과 은하상을 제외하면 대다수 SF 대상은 '단체 투표'에 의해서 선정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단체 투표' 방식에는 단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작품성은 좋지만,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은 선정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팬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선정하는 인기상 형태의 휴고상, 성운상은 그래도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단순히 '베스트셀러상'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를 보완하고자 각각의 상은 모두 2차례 이상의 투표 과정을 거칩니다. 첫번째 투표는 1~3월 정도에 진행되고 후보 발표를 거쳐, 두번째 투표가 5월 정도에서 행사 당일까지 진행합니다.


  즉, 첫번째 투표를 통해서 후보작을 소개함으로써, 어떤 작품을 뽑을지 알릴 시간을 준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SF 작가라고 해도, 그리고 10만원, 20만원씩 내면서 행사에 참여하는 SF 팬이라도 후보작 모두를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후보작을 소개하면 그것만으로도 해당 작품들을 접하기 위해 노력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적어도 10만원, 20만원씩 내면서 SF 행사에 참여하는 팬이라면 5~6작품의 후보작은 다 사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기에 휴고상이나 네뷸러, 성운상과 SF 대상 같은 상들의 개성과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위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물론 투표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관리 위원회도 있습니다.) 어느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작품이 선정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원이 제한되다보니 단체표에 의한 부정이 없다고 볼 수 없겠지만, 그게 수천명에 이르게 되면 아무래도 쉽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SF팬들이, 또는 SF 작가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선정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후보작 자체가 먼저 알려지게 되고, 이를 투표해야 하는 만큼, 사람들이 사전에 그 작품을 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상은 '후보작'에 오른 것 만으로도 판매량이 대량으로 증가합니다. 휴고상이라면 3000여명의 팬들, 성운상이라도 1000여명의 팬들이 그 작품들의 구매 후보자들이니까요. 게다가 후보작이라는 이야기는 설사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그 책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 됩니다. (이 자체가 작가에게는 '인세'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일본 SF 대상처럼 스폰서가 있는 상은 상금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 상을 '팬들'이나 '작가들'이 함께 뽑는 기분을 준다는점입니다. 우리가 뽑은 작품, 우리가 추천한 작품이 되는거죠.



[ 휴고상을 받고 기뻐하는 작가들. 왼쪽부터 데이브 하트웰, 찰스 N. 브라운, 코니 윌리스. ]


  휴고상이나, 네뷸러상, 그리고 성운상과 일본 SF 대상이 시작될 때 제각기 '공정성'에 대해서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사위원이라는 소수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팬의 힘, 작가의 힘을 믿었습니다.


  SF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그 후보작을 모두 사서 보고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 상은 각각 그 나라에서 SF 부문의 권위가 되었습니다.



  작가가 심사를 맡는게 마땅하다면, 한 두명의 권위있는 작가가 아니라, 수십 명의 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팬이 심사를 맡는다면, 몇 명의 권위있는 팬이 아니라, 수백, 수천명의 팬이 함께 참여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 한명의 팬이 만들어낸 '암흑성운상' 시상식. 행사 그 자체에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시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그럼으로서 SF 시상식은 축제가 됩니다. 여럿이 웃고 즐기며 함께 SF를 보고 노는 잔치가 됩니다.


  즐거운 자리가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오래 머무르고, 더 새로 찾아오게 됩니다.



  좋은 SF를 고르는데, 권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SF는 심각하고 고민하며 보는게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게 보는 것이니까요.


  성운상 처럼 라이트 노벨도 선정될 수 있고, 휴고상처럼 판타지도 -SF팬이 보기에 재미있다면- 뽑힐 수 있는 상.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그런 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SF 인기상'이 될 수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