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

윌리엄 깁슨에 대한 단상

  어제 안철수씨가 대선 출마 선언 기자 회견에서 '존경하는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잠시나마 윌리엄 깁슨과 SF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데요.


  윌리엄 깁슨에 관련된 장문의 이야기는 언젠가 나중에(시류를 타지 않고? ^^) 쓰기로 하고, 오늘은 깁슨의 짧은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안철수씨가 대선 출마 선언에서 언급한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작가로 유명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자로 된 '전뇌 공간'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깁슨의 책을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는 컴퓨터를 잘 몰랐지만, 탁월한 상상력으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깁슨은 공학도도 과학자도 아니었고, 문학과를 나왔으며 컴퓨터를 잘 못 쓰고 인터넷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적어도 과학적인 상상력은 충분했던 것이지요.


  SF를 쓰거나 보려면 과학을 잘 알아야 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윌리엄 깁슨은 그 대표적인 반증 사례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과학을 잘 알면 도움이 되겠지만, 반드시 과학을 잘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가 제시한 사이버 스페이스는 단순히 가상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전자 인격이 탄생하거나 죽은 사람의 인격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채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계와 인간의 융합, 깁슨이 생각한 사이버 스페이스는 사실상 인류의 진화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더욱이 그는 인간과 기계의 융합으로 구성되는 사이버네틱스의 가능성을 충실하게 열어준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몸을 기계로 바꾼 사이보그라는 개념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지만, 깁슨은 여기에 네트워크라는 것을 결합함으로써 단순히 "600만불의 사나이"가 아닌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인간 가능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가상 현실의 세계 모습을 가장 잘 연출한 것이 "매트릭스"라면, 네트워크와 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잘 그려낸 것은 역시 "공각기동대"입니다. 그 밖에도 가상 현실 속에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근래에 수많은 작품에서 언급되기도 했지요.



  깁슨의 소설은 '뉴로맨서'(황금가지)와 '아이도루'(사이언스 북스)가 국내에 나와 있지만, 솔직히 읽기는 힘듭니다.


  우선은 깁슨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그리고 깁슨 자신이 각본에 참여한- 영화 "코드명 J(쟈니 니모닉)"를 먼저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코드명 J"는 뉴로맨서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뉴로맨서의 여전사 몰리의 옛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뉴로맨서에서도 쟈니에 대해서 잠깐 언급합니다.)


  그만큼 깁슨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좀 더 쉽게 이해하게 도와주지요.



  사실 깁슨이 그려낸 미래는 솔직히 암울합니다. 세계는 다국적 기업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생명조차 가차없이 처분합니다. 그들은 폭력과 금력, 그리고 권력을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지요.


  경제적인 논리가 우선되면서 돈이 없어서 장기를 팔고 인공 장기로 바꾸는 일까지 비일비재 합니다. (게임판 "뉴로맨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실제 게임 시스템으로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은 지옥과도 같은 환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네트워크라는 세계는 오직 암울한 미래만을 보여주지 않으며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그러한 와중에서도 인간성이라는 것의 가능성, 그리고 인간 관계의 가능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에 희망을 갖게 하지요.


  세계 각지에 아직도 독재 정부가 넘쳐나고 다국적 기업의 횡포가 계속되지만, 네트워크라는 것이 그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는 현실이 그대로 대입되는 듯 해서 깁슨의 상상력이 놀라움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참고로 안철수씨가 언급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not very evenly distributed.)"라는 윌리엄 깁슨의 말은 1993년 NPR(미국 공영 라디오) 인터뷰에서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1999년의 NPR 방송 'Science in Science Fiction(SF속의 과학)'에서도 다시 말하고 있죠.  


http://www.npr.org/templates/story/story.php?storyId=1067220



  저로선 공영 라디오에 이런 방송이 있다는 것이 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