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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과 도시전설

미르 정거장의 우주박테리아. 박테리아는 정말로 미르를 먹어치웠을까?

(* 이 글은 이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전한 글입니다.)

  미르 우주 정거장(Mir Space Station)은 달을 향한 경쟁을 포기한 러시아가 눈을 돌린 우주 정거장 살류트에 이은 대형의 우주 정거장 시설입니다.
 
  개혁과 개방을 내세운 고르파초프가 정권을 잡은 다음 해인 1986년에 코아 모듈을 올리며 건설이 시작된 미르호는 1996년에 이르기까지 총 7개의 모듈을 올려 완성했지요. 그리고 2001년 대기권에 돌입하여 사라지기까지 15년간에 걸쳐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방문하여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 미르 우주 정거장과 연결된 아틀라스 우주 왕복선. 이것은 소유즈-아폴로의 연결 사건 이래 우주 협력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년) 등 냉전이 물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운영된 미르는 일본의 방송인이 리포터로서 탑승하고(1990년), 미국의 우주 왕복선이 도킹(1995년 아틀라스 이후)해서 함께 임무를 진행하는 등, 이제껏 경쟁으로만 일관한 우주 개발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었지요.
 
  미르호는 우주 조종사의 최장기 체류 기록을 세우는 등 많은 전설을 남기기도 한 우주 정거장이지만, 소련의 붕괴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고 게다가 미국 주도의 국제 우주 정거장 계획이 수립되면서 결국 2001년 3월 23일, 남태평양의 바다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미르호는 오랜 기간 운영을 하며 많은 기록을 남기고 동서 화해의 상징이기도 한 우주 정거장이었습니다. 최초로 민간인이 탑승한 우주 시설이자, 리얼리티 프로를 촬영하는 등 상업적으로 이용한 최초의 우주 정거장이기도 했지요.
 
  그래서일까요? 미르호가 폐기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아쉽게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언론에서 미르호 폐기에 대해 보도했는데, 당시 러시아 우주 개발 기관에서 일하던 유리 카라쉬(Yuri Karash)가 인터뷰 중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미국에서 비행 등의 훈련을 받은 유리 카라쉬는 해외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방사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우주 정거장에서는 각종 미생물들이 다양한 변이를 일으킵니다. 미르호에서 15년 간 고립된채 변질된 미생물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큰 위험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는 우주 공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앞으로의 우주 계획에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미르호를 폐기한 것은 바로 박테리아가 이상 증식했기 때문이며 이를 감추기 위해 폭파하여 가라앉힌 것이다."
 
  그리고 그 박테리아가 우주에서 나온 것이며 금속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위험한 종이기 때문에 분명히 살아남아서 지구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보너스까지 첨부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유리 카라쉬는 그렇게 말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러시아에서는 미르호의 미생물에 대해서 감춘 일이 없습니다.
 
  회로를 갉아먹은 미르호의 미생물 이야기는 2000년에 -즉, 미르호를 폐기하기 전에- 유리 카라쉬가 스페이스 닷컴에 기고한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스페이스 닷컴 기사 링크 )
 

 
[ 곰팡이에 의해 부식된 통신 회로 기판. 작동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출처 : 스페이스 닷컴) ]
 
 
  이 기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2000년 4월) 미르호에 도착한 승무원들은 유리창이나 회로판의 에나멜 위에 곰팡이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1998년부터 1999년에 미르호에서 진행된 24차 임무 중 곰팡이 때문에 통신기기의 회로가 부식된 사건이 있었는데, 실제로 우주 정거장에서는 많은 양의 미생물이 발견된다.
 
  밀폐된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변질된 미생물은 조종사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으며, 승무원들과 함께 지구에 들어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이런 피해를 막으려면 우주로 보내는 화물이나 우주선을 철저하게 소독해서 미생물이 번식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임무 수행 중 승무원은 정기적으로 살균 조치를 하고, 음식물 또한 철저히 소독할 필요가 있다.
 
  우주 공학자인 노비코바는 "국제 우주정거장이나 화성 탐사 같은 미래의 계획을 진행할 때는 미생물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소련의 우주국 정책 전문가인 유리 카라쉬. 그를 비롯한 많은 이는 우주인의 건강을 위해 미생물을 철저하게 살균할 것을 주장해 왔다.(출처 : 위키피디아.) ]
 
  사실 우주 정거장처럼 고립된 환경에서의 미생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었던 사항입니다. 이를테면 초기의 우주 비행사들은 지구로 귀환하여 한동안 격리된채 생활해야만 했고, 바이킹 탐사 때에는 혹시라도 세균이 묻어갈까 철저하게 살균한채 보내기도 했지요. (근래에도 발효식품인 김치를 우주 식단에 넣고자 원자력을 이용해서 살균하기도 했습니다. 쿠키뉴스 기사 링크
 
  하지만 미르호에서 회로를 부식시킨 미생물이 우주에서 날아왔거나 우주에서 특별히 발생한 종은 아닙니다. 유리나 에나멜이 곰팡이에 뒤덮이는 일은 지구에서도 흔한 일이며, 금속을 부식시키는 미생물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미르호라는 특별한 물건... 게다가 우주 공간이라는 상황은 수많은 상상을 불러오는 법... 그리하여 "금속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갉아먹는 죽음의 우주 박테리아 때문에 미르호를 파괴했다."라는 음모론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1. 미르호의 폐기는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가 국제 우주 정거장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이미 결정된 것이었고, 폐기 당시 미르호는 2000년 6월 이래 무인 상태... 즉 쓰지 않는 상태였지요. 이미 폐기는 결정된 사항이었지만 러시아 측의 미련으로, 그리고 발사 계획 상 다음 해 3월에야 폐기할 수 있었습니다.
 
2. 러시아에서는 곰팡이 때문에 회로가 부식된 것을 공개한 것처럼 미르호의 상황을 대부분 공개했습니다. 새삼스레 폐기를 앞두고 발표한 것이 아니지요. 나중엔 상업적으로도 사용된 미르호는 국제 우주정거장 이전까지는 우주 계획 중 비밀이 가장 적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사고나 사건은 모두 공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1999년 6월에 일어난 프로그레스 무인수송선의 충돌 사건은 그 극적인 상황이 모두 소개되어 충격을 주었지요.
 
3. 우주 곰팡이(Space Fungi), 또는 우주 박테리아(Space Bacteria)라는 용어를 쓰긴 하지만 그건 우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즉 정거장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가져간 것입니다. 24차 임무 진행 중 회로를 부식시킨 곰팡이도 지구에 흔한 종류였지요. 살균만 잘했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텐데... (물론 살균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1,2년 정도로 우주 정거장에 구멍이 뚫릴 일은 없습니다. 녹이 조금 더 빨리 스는 정도이며 만일 구멍이 뚫리면 곰팡이는 죽어버리겠지요.)
 
4. 2000년 4월 미르호의 문을 열었을때 곰팡이를 발견한 것은 분명히 불쾌한 일이겠지만, 이건 낡은 집에 들어갔을때 여기저기 곰팡이가 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당시 미르호는 4개월 동안 무인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의 집을 4개월 동안 비워두면 과연 곰팡이가 피지 않을까요?) 그래서 미르호 승무원들은 미르호 내부를 청소해서 73일간 여러가지 작업을 했습니다. 물론 그 동안 구멍이 뚫려서 엉망이라든가 그런 일은 전혀 없었지요.
 
5. 미르호에 살던 미생물은 우주 공간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주선은 강력한 살균 효과를 가지며 어떤 미생물도 진공 상태에서 오랫동안 살 수는 없지요.
 
6. 미르호 등 우주에서 돌아온 미생물은 지구 환경에 특별히 유해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 스페이스데일리 2000년 10월 기사 )
  참고로 이 기사는 미르호 폐기가 확정된 시점에서 발표한 내용이지요. 여기서도 미르호 폐기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 앞서 말했듯 유리 카라쉬는 "소련이 미르를 포기한 것은 미생물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관련자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앞으로의 우주 개발 계획에서 미생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뜻으로 말했을 뿐... (참고로 그는 지금도 러시아의 우주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주에서 날아온 박테리아 때문에 미르호를 버렸다."라는 이야기는 사실을 왜곡한 거짓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미르호에선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단지, 우주정거장 내의 미생물 문제를 우려한 목소리가 와전되었을 뿐이지요.

  그런데 만일 우주 정거장에 있던 미생물이 지구에 돌아온다면 그것은 정말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제로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앙"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겠지요. 신종 플루나 사스, 조류 독감, 또는 에볼라 같은 상황은 물론 벌어질 수 있습니다만...
 
  우주 공간에서 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트랜스포머같은게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변이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지금도 무수하게 벌어지는 변이와 다를 것은 없지요. 물론 그런 미생물이 위험한 질병을 야기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가 절멸하거나 건물을 마구마구 갉아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일반적인 미생물처럼 살균하고 항생제로 처리할 수 있을테니까요.
 
  다만, 우주 정거장의 미생물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정거장에서 활동하는 우주인들에게...
  그들은 무중량 상태에서 스트레스와 방사능의 영향으로 면역력이 매우 떨어진 상태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가볍게 넘기는 감기조차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지구에서 수백km 이상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병에 걸려서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돕지 못합니다. 그런 만큼 병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미생물은 위험한 것이지요.
 
 
  이렇게 음모론의 내용과는 다르지만 우주정거장 내의 미생물을 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르 박테리아 음모론은 유익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이로 인해 우주정거장에서의 세균 문제에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이 아닌 거짓을 이용한 음모론은 경고나 주의를 주지 못합니다. 단지 놀라고 겁먹게 하고 진실을 왜곡시킬 뿐이지요.
 
  그리하여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이들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속 마을 사람처럼 정말로 중요한 진실에서조차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음모론이 재미있고 흥미로울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미르호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 후의 미르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990년대 소련(러시아)이 국제 우주정거장 계획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미르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미르 계획과 국제 우주정거장 계획을 함께 진행할 여력이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미르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1986년에 제작되기 시작한 미르는 -영화 [아마게돈]에서 소개된 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낡았고 기재조차 열악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운영비가 들어가기도 했지요.
 
  게다가 1997년에는 화재가 발생한 것에 이어 6월 프로그레스 무인 수송선이 미르에 충돌하여 모듈 하나가 완전히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급격하게 산소가 빠져나가는 상태에서 정상 상태를 벗어난 미르는 태양전지로 공급하는 전력조차 잃고 추락할 위험에 처했지만 당시 탑승자들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무사할 수 있었지요. (당시 탑승자들은 소유즈로 탈출하는 선택을 미루고 상황 해결에 전념했는데 그들이 아니었다면 미르가 지구에 떨어져 대참사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파괴된 모듈은 폐쇄되었고 그후에도 수리하지 못했습니다. 모듈은 새로 만들어 올려야 할 정도로 파괴되었는데 어차피 폐기할 미르를 위해 그만한 비용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1999년 미르에서 승무원이 떠나면서 무인 상태가 되었던 미르는 미국의 데니스 티토를 중심으로 결성한 미르 코프(Mir Corp)의 지원으로 일시적으로 민간 운영을 하게 됩니다. 2000년 4월에 미르에 도착한 탑승자는 6월까지 미르를 정비하고 리얼리티 쇼 방송을 비롯한 여러 '상업적인 활동'을 진행했지요.
 
  73일간의 실험 운영 기간 동안에 거둔 상업적인 이익은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건설되던 국제 우주정거장이 있음에도 러시아의 우주 정거장을 이용한다는 점에 부정적인 여론이 늘어났고, 여기에 미르를 보다 높은 고도로 올리고 정비해서 운영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거라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최종적으로 미르 코프는 미르를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미르 승무원들이 73일만에 떠난 것도 박테리아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시험적으로 운영해 보고 괜찮다면 미르호를 완벽하게 정비해서 다시 진행하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고 게다가 주주 중 한 명인 데니스 티토의 관심이 국제 우주정거장으로 옮겨가면서 미르의 상업적인 운영 계획은 막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미르는 2001년 3월에 최종적으로 파괴됩니다.
 
 
  만일 박테리아 때문에 미르호를 파괴하기로 했다면 2001년 3월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2000년도 중반기에 이미 상업적인 이용이 중단되었으니 이 시점에서 파괴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겠지요.
 
  2001년 3월에야 파괴한 것은 앞서 말했듯 러시아가 미르를 어떻게든 써 보려고 고민했기 때문입니다.(미르 코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공동 출자로 만든 회사입니다.) 다시 말해 미르를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미르의 궤도는 점차 낮아지고 있었고 이대로 두면 갑자기 추락해서 대참사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 게다가 국제 우주 정거장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미르호를 처리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모든 과정은 러시아-그리고 미르호 운영을 도왔던 모든 이들-가 자발적으로 공개했습니다. 특히 후반기에는 상업적인 후원자를 얻고자 더 적극적으로 미르호 선전을 했지요.
 
  결국 "진실은 거기(눈 앞)에 있었습니다." 단지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않았을 뿐...


원문 링크 : 표도기의 타임라인 ( http://blog.naver.com/pyodogi/110077887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