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이야기 2012.06.17 17:10

  무협을 좋아하는 분들께 한 단편 작품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무림 매니아". 80, 90년대에 지나치게 양산되었던 무협 소설들의 문제점을 파고들고 이를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이를테면, 무림 제패를 노리는 사파 조직이 한 명의 청년 영웅과 기연에 의해 모든 것이 망쳐졌던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자, "대영웅말살지계(大英雄末殺之計)"라는 이름으로, 기연을 만날 만한 깊은 계곡을 화약으로 몽땅 막아버리거나(절애봉쇄작전) 전역에 고아원을 세워 복수심을 가질만한 아이들을 관리하고(고아관리작전), 전국의 영재와 기재에게 무림에 대한 나쁜 정서와 혐오감을 심어(영재세뇌작전) 아예 무림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등 계약을 꾸밉니다.


  무림의 판도에서 '백리, 독고, 모용, 제갈, 위지' 등 매우 희귀한 성씨가 판치는 상황을 참지못한 이씨들이 모여 만들어진 무적이씨세가(일이-一二).

  흑암회, 일월마교, 고루궁의 세 사파 조직(삼사-三邪).

  비정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 적을 살육하는 다섯 명의 초강자(오육-五戮).

  그리고 구파 일방 중 살아남은 일곱파(칠팔-七捌)


  이렇게 '일이삼사오육칠팔'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도망치던 어머니는 사파 조직의 작전으로 기연이 있는 절벽도 찾지 못하고, 도망만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접근을 차단하는 포위망 때문에 지나가던 전대기인이나 은둔 지사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


[ 오지로 떠나는 주인공. 어떤 기연이 기다리고 있을까? (배트맨 비긴즈 / 워너 브라더즈 ) ]


  그런 상황에서 사파에 의해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 주인공은 도가 사상과 불교 사상으로 세상의 허무함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매번 기연과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가득한, 게다가 항상 같은 상황과 대사가 반복되는 무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납니다.


  그게 그거인 무림 이야기를 너무 들은 나머지 대다수 아이들은 무림 이야기만 나오면 짜증을 내고 심지어는 졸지만, 주인공 만큼은 무림 이야기에 열중합니다. 무림 이야기에 빠져 들어 잠을 자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아이라 하여 매니아(寐怩兒)라 불리게 됩니다.



[ 무협 세계에서 흔히 나오는 절경에 감추어진 신비한 사원. 이들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배트맨 비긴즈 / 워너 브라더즈) ]


  사파의 음모(영약제공작전)로 전대기인이나 은거인사들 대부분이 내공이 너무 높아져 좌화해 버린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은거인사에게 무공을 배운 주인공은, 은거 인사의 손녀와 만나서 xxx를 하고 동료들을 모으고 영웅대회에 나가 무림 맹주가 되는 등 활약 끝에 사파의 배후에 있던 신비인과 대결하고 승리...


  무협지를 꽤 읽었다는 이들이라면 정말로 웃음이 가득한 패러디 작품입니다. 주인공의 얼굴이 영 아니기 때문에 인피면구로 감추고 있다는 등, 그야말로 무협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꼬집는 연출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꽤 오래전 <마왕의 지침서(원제 : Peter's Evil lord list)>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 일이 있습니다.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5m 앞에서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부하는 표적으로 삼아라."처럼 '마왕에 대한 조언'을 통해서 판타지나 SF 작품 등에 등장하는 악의 군주가 하는 바보 짓을 비꼬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매우 많아서 230개가 넘었고 당시 그런 불만을 느끼던 많은 이가 있었기에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이를 바탕으로 많은 패러디 작품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SF(정확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를 소재로 한 딴죽 작품 "공상비과학대전" 같은 글이 유행을 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디 작품과 여기서 소개한 김유석의 <무림 매니아>가 다른 것은, 앞서 말한 <마왕의 지침서> 같은게, 단순히 해당 작품이나 장르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인 반면, <무림 매니아>는 그야말로 무협을 좋아하고 오랜 기간 숙지했던, 더 정확히는 '무협을 사랑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그런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패러디라면 단순히 비꼬는 것으로 끝내는 사례가 많습니다. 객관적이라고 말하지만, 더 정확히는 냉소적인 태도로 가득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게 가능할리가 있어?"


  <공상비과학대전>이나 <마왕의 지침서> 같은 글에는 이처럼 오직 비난 만이 가득합니다.



  물론 이런 글은 재미있습니다. 이런 글을 참고로 만들어낸 창작물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미는 대개 피상적인 것에 그치고 맙니다. 개그로 보자면 바보 짓을 해서 얻어맞는 장면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싸구려 코미디.(슬랩스틱 코미디?) 그 이상의 감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재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무림 매니아>는 다릅니다.


  이 작품에는 무협에 대한 깊은 이해와 비꼬기를 통해 가져오는 웃음만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재미가 함께 녹아있습니다. 단순한 딴죽이 아니라 진정한 패러디 작품으로서의 매력,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협으로서의 재미가 녹아 있습니다. 무협의 코드를 모르면 아무래도 재미가 덜하겠지만, 이야기 구조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개연성이 잘 되어 있고, 억지스러운 점도 거의 없습니다.


  진정한 패러디는 단순히 비틀기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적당한 길이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군요.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잠깐 소개해 보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매니아 부부도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의 어느 날 한 명의 청년이 

그들을 찾아왔다. 청년은 어릴 적부터 매니아에 대한 무용담을 듣고 자라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청년은 한가지 질문을 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으셨던 비결

이 알고 싶습니다."

"비결이라……"

매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무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

이네. 어릴 적 무림이라면 손가락질 먼저 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

도 나의 애정은 식지 않았던 거야. 그게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세."          

                                                                  (김유석 - 무림매니아  중)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렇게 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이런 상황도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찾아내고 작품으로 옮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하고 싶으신가요?



여담) SF 사상 최고의 패러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 작품은 SF의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운 코드를 절묘하게 비틀고 뒤집어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전세계 수많은 이에게 사랑받은 것은 단순히 패러디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을 가진 작품으로 충실한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림 매니아" 역시 짧은 단편이 아니라 좀 더 완성된 장편으로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추신) 이 작품은 PC 통신 시절 무림동에서 소개되었고, 이후 김유석님의 스승이자 무협 작가인 금강님께서 문피아에 소개했습니다만, 시스템 문제인지 뒷 부분이 잘려 나갔습니다. 완전히 공개되었던 작품인 만큼 텍스트 파일을 동봉합니다. (이런 류의 무협 단편들이 함께 묶여서 책으로 소개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원문 출처는 하이텔 무림동, 2차 출처는 문피아.


http://www.munpia.com/bbs/zboard.php?id=short&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무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2


http://www.munpia.com/bbs/zboard.php?id=short&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무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3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무협 이야기 2012.06.17 16:57

  간장(干将)과 막야(莫邪, 또는 막사)는 흔히 명검의 상징처럼 소개되는 검의 이름입니다.


  "제아무리 명검이라도 숫돌에 갈지 않으면(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무딘 칼이다."라는 격언과 함께 전해지지만, 사실은 그보다도 중요한 협(俠)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이 내용에는 담겨 있지요.



  천하를 평정하고자 했던 오왕 합려는 특히 귀한 무기를 바랐는데, 희귀한 철을 얻어 간장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장인에게 주며 칼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철은 쉽게 녹지 않았고 간장은 아내인 막야와 함께 갖은 노력 끝에 두 자루의 칼을 만들 수 있었지요.



[ 간장과 막야... 그 전설의 시작 ( 출처 : showchina.org ) ]


  하지만, 합려가 약속한 기일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간장은 신의를 버릴 수 없다며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딴 막야검을 들고 합려에게 갑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간장이라는 검은 남겨두고….


  칼을 바치자 합려는 기뻐하기는커녕 날짜가 늦은 것만을 추궁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여버리도록 명했지요. (간장이 그 실력으로 남에게 좋은 칼을 만들어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죽고 얼마 후 막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막야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어릴 때부터 무술을 갈고 닦으며 합려를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이 지나치게 강했던지 이 사실이 합려의 꿈에 나타나게 되지요.


  빛나는 검을 들고 복수를 맹세하는 젊은이…. 그 모습에 놀란 합려는 꿈속에서 본 사내의 모습을 그려서 수배합니다.


  간장과 막야의 아들은 복수하기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습니다. 이 신세를 한탄하며 괴로워하는데 한 길손이 지나다 그를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길손은 그에게 말합니다.


  "자네의 목을 내게 준다면 자네의 뜻을 이루게 해 주겠네."


  젊은이는 길손을 믿고 자결을 했습니다. 길손은 그의 목과 검을 들고 합려를 찾아갔지요.

  자신을 해치려던 젊은이의 목을 가져왔다는 말에 합려는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 순간 길손은 칼을 들어 합려의 목을 베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오왕 합려는 당대의 권력자 중 하나입니다. 그런 권력자에 맞서 복수를 하겠다는 아들의 의기도 대단하지만, 그런 의기에 호응하여 아무런 보답 없이 목숨을 던져 왕을 암살하는 길손의 의기 또한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 길손을 믿고 목을 내어준 아들 또한 놀랍지요.)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의를 버리지 않고 힘든 이를 돕는다는 협(俠)의 화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본 협(俠)의 모습은, "강인한 힘(권력)을 가진 불의에 대해 그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오왕 합려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야겠지요.)


  불의에 대해 복수하고자 했던 아들과 그의 의기를 믿고 대신 복수해주겠다고 한 길손…. 그리고 아들은 바로 그런 길손의 의협심을 믿고(信), 자신의 목숨을 바칩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단지 길손의 마음만을 믿고 목숨을 바쳤고, 길손은 그런 아들의 신뢰에 보답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졌습니다. 이를 통해 권력을 얻은 것도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뜻만큼은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의협이라는 것의 깊은 무게를 알려준 것이지요.


  물론 이 이야기는 전설입니다. 합려는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계략으로 패했을 때 입은 상처가 덧나서 죽은 것이 역사적인 사실로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꾸준히 내려온다는 사실만으로 중국인들이 의협(義俠)에 대해 얼마나 동경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추신) 앞서도 말했지만, 여기서 오왕 합려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 점에서 의협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忠)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충(忠)이란, 나라라는 대상 그 자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협(俠)은 나라나 조직이 아닌 사람과 그의 신념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수호전의 호걸들이 양산박을 나와 관군이 되어 반란군과 싸우며 죽어간 것은 그들이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고 따르는 수령이자 그들의 의기를 알아준(의협심이 넘치는) 송강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목숨을 바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조차 송강에게 감사합니다. 그가 자신을 믿고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협(俠)의 또 하나의 모습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협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강호 세계에서도 사실은 권력과 명예를 노리는 이들의 암투가 계속되지요. 그래서 김용의 <소오강호>에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위해 강호를 떠나고자 결심한 이들이 강호의 암투 속에 슬프게 숨을 거두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담) 위의 전설에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길손이 오왕을 만날 당시, 오왕은 자신을 꿈 속에서 괴롭힌 자의 목을 삶아버리려고 기름 솥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길손이 오왕의 목을 베고 자신의 목을 베었을때 오왕과 아들과 길손의 목이 기름 솥에 함께 빠져버렸고, 관리들은 어느 것이 오왕의 목인지 구분할 수 없어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 한 선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왕은 영웅이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간장의 아들도, 그리고 그의 뜻에 동감하여 목숨을 바친 길손도 모두 영웅이니 함께 합장하자."

  결국 세 사람의 목은 한 자리에 묻혔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뜻을 기려 세 영웅의 묘(삼왕묘)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하지요.


여담) 삼왕묘의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지만, 중국의 역사 속에는 실제로 이 같은 이야기가 많이 존재합니다.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했던 것으로 유명한 형가의 이야기 역시 이와 비슷한 사례이지요. (그의 이야기는 [영웅]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금 정리하여 소개하겠습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무협 이야기 2012.04.17 12:57


[ "악수!" 싱고에게 손을 내미는 사쿠라. 이처럼 회사조차 전혀 다른 작품의 두 캐릭터가 마주할 수 있다는 것도 게임 만화만의 특징이다. ]

 

  캡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을 선보인 이래, 격투를 소재로 한 게임이 무수하게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원소스 멀티 유즈로 유명한 일본. 당연히 격투 게임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이게 마련입니다. 소설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등... 물론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는 상황도 드물지 않지요.


  격투 게임의 인기를 생각하면, 이들 작품들도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멋진 주역과 멋진 악역이 넘쳐나는 작품들... 이런 작품을 소재로 한 창작물들이 인기가 없을 리도... 그리고 재미가 없을 리도 없지요.

 

 

  그러나, 기실 선보인 작품들은 솔직히 그다지 유쾌한 것들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재미없습니다.

 

  류와 켄이라는 영원한 라이벌을 중심으로 격투 게임 사상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고, 여기에 전작의 보스 이상의 강력한 적수를 등장시켜 격투 게임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스트리트 파이터2"를 시작으로, 격투 게임 사상 손꼽는 멋진 악역, 기스 하워드를 내세운 "아랑전설", 그리고 "용호의 권"... 여기에 3인 대결이라는 체제로 숫자로 밀어 붙인 "킹 오브 파이터즈"나, 3D로 흥미를 끈 "버추어 파이터"나 "데드 오어 얼라이브" 등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인기를 끌었던 게임은 대부분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지만, 게임으로서는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게임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좋게 봐주어야 범작... 대개는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되곤 하지요.

 

  소재도 좋고, 스토리나 캐릭터도 좋은데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격투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너무 많은데다 작가의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격투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제각각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단독으로 한 개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이지요. 그렇듯 다양한 내용들을 몽땅 풀어 버리려 하니, 그대로 종합 선물 세트가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게다가 이미 있는 게임의 캐릭터들이다보니 캐릭터마다 인기도 있고 팬들도 있게 마련. 자칫하면 여기에 휩쓸려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 문제도 있고 말입니다.)

 

  일반적인 만화의 캐릭터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인기를 얻어가고 팬을 얻게 마련인데 그럴 기회도 시간도 없는 상황인 것이지요.


 

  하지만 격투 게임 만화 중에서도 이른바 '명작'이 있으니, 바로 <파괴마 사다미츠>라는 작품으로 애니메이션화를 이루기도 했던 나카하라 마사히코(中平正彦)씨의 격투 게임 시리즈입니다.

 

  주로 아케이드 게임지인 게메스트와 코믹 게메스트에서 필자나 객원으로서 취재를 하며 연재를 진행했던 그는, 그 후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소재로 한 게임 만화인 <캐미 외전>을 시작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등의 작품을 통해 그 세계를 만화로 선보였지요.

 


[ 국내에도 출간된 "힘내라 사쿠라!". 주역도 아닌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의 성장을 충실하게 연출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

 

  게임의 이야기를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완성한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사쿠라라는 한 명의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의 성장 일기를 그린 <힘내라 사쿠라>, 그리고 류라는 인물을 심층 깊게 분석하여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던 <류 파이널>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원작을 생각하지 않고 단독으로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으며, 독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들 대부분은 대원씨아이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었지만, <스트리트 파이터 II 캐미 외전> 만큼은 해적판으로만 나왔습니다. 그것도 아쉽게도 마지막 화가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


  그의 작품은 단순히 게임 속의 인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캐릭터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연출해서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더해줍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가 게임에 선보이는가 하면, 제작진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아, 사실은 그랬던 건가?"라고 감동하여 공식 설정으로 넣어버리곤 하니, 정말로 이례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지요.(이를테면, 사쿠라의 라이벌로서 <SNK vs CAPCOM> 등에서도 활약 중인 소녀 칸자키 카린은 바로 만화에서 먼저 나온 캐릭터입니다. 그 밖에 댄 히비키의 설정 등 많은 부분이 실제 게임에도 영향을 주었지요.)

 


[ 도발 전설이라는, 오직 도발 만은 위한 필살기로 패러티에만 치중하던 그가 만화에선 이렇게 멋진 내면을 보여준다. 물론 개그도 충분.^^ ]

 

  그의 작품에는 본래부터 매력적인 스트리트 파이터의 캐릭터들이 더욱 멋지게 그려지는데, 심지어는 개그 캐릭터로 패러디 전문에 지나지 않는 댄 히비키 조차 인간적인 깊이가 느껴질 정도이지요. 여기에 만년 악당 장기에프도 러시아의 영웅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만족감을 주니,  "영원한 구도자"인 류, 그의 라이벌 켄, 숙적인 사가트 등에 이르면 그 매력이 더해져서 정말로 감동을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특히 '류'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멋지게 보여 지고 있는데(사쿠라를 주역으로 한 작품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사가트와의 대결에서 살의의 파동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그 만의 권을 탄생시키는 모습은 진정으로 "영원한 구도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느낌... 그가 스파 시리즈의 주역인 이유를 느끼게 하지요.

 


[ 이렇게 주먹을 쥘 수가 있는 한... 격투가에게 진정한 패배란 없다.

  비록 손가락 하나에라도 투지가 남아 있지만... 격투가는 절대로 진정으로 패하지 않는 것이다. ]

 

  하지만, 류 혼자만이 멋지다면 뭔가 부족하겠지요. 그래서 그는 라이벌인 켄, 그리고 무엇보다도 류의 영원한 숙적 사가트에게도 영혼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가트라면 스파2에서 사천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치사한 악당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제왕"이라 불리며 "투신강림", "집념의 범" 등 다양한 불리는 그가 승리를 위해서 베가에게 빌붙는다는 설정은 솔직히 납득하기가 어렵지요.(전작의 보스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 대만의 만화 같은 데선 '쌍가트'라는 이름으로 비열한 악당으로 나오기도 했던 그이지만, 이 작품에선 진정한 제왕이자 '류의 숙적'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그런 점에서 나카하라씨의 작품에서는 켄에 못지 않게 그의 비중을 키워줌으로서 감동을 더해줍니다. "부하가 되면 사이코 파워를 주겠다"고 하는 베가에게 "나는 패했어도 제왕이다."라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최고의 숙적이라는 분위기를 정말로 절실하게 전해 주고 있지요.

 

  심지어, "류 파이널"에서는 정작 스토리와는 관련 없는 듯한 사가트의 이야기(류에게 패배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카트의 이야기인 만큼 그가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도 하는데, 바로 이 장면의 대사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그래 난 두려워 했다. 상처 입는 걸, 패배하는 걸.

 이 소년이, 가슴의 상처가 가르쳐 주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난 제왕 강해져야 한다.

 

 전신에 새겨진 상처들. 그것은 나와 싸운, 나를 고통스럽게 한 용기있는 자들이 남긴 것.

 내가 추락하면 내게 도전하는 자들도 추락할 것이다.

 

 용기있는 자여 내게 도전하라.

 내게 단 하나의 상처를 입혀도 난 널 진심으로 존경하리라.

 난 너의 눈 앞에 막아서 있는 벽이다."



 진정으로 제왕, 강자의 풍모를 충실하게 느끼게 하는 대사가 아닐까요?

 류라는 구도자가 그에게 도전했던 것. 그 밖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도전했던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해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 만의 일격 필살, 그 자신이 추구하던 권을 얻은 류와 대결합니다.

 격투가로서 이상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살의의 파동을 얻었지만, 그것을 버린 류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스파 제로>에서 붉은 두 사람, 켄, 그리고 가이와 대결하고, 격투가로서 베가를 쓰러뜨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사쿠라가 그를 동경하는 이야기를 통해, 마지막으로 그 자신이 스스로의 일격필살을 얻어 숙적과 다시 한번 마주하는 장면을 통해서 류라는 캐릭터는 생명을 얻고 격투 게임 사상 가장 매력적인, 영원한 구도자로서 자리잡게 되었지요.

 

  그리고,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고우키와의 대결(이 역시 나카하라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에서 정식으로 확정된 공식 설정입니다)로서 다음대로 이어지는 이야기...

 


[ 최후까지 무술가로서, 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스러지는 고우키 ]

 

 

  격투 게임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았지만, 다음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고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솔직히 나카하라씨의 이들 작품 뿐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겉 모습 뿐인 게임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술가와 라이벌, 숙적과 사악한 제왕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나카하라씨의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게이머의 눈으로 캐릭터를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스스로 게임의 팬이기도 하고, 실제로 캐릭터에 대한 그의 묘사에는 애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게이머로서, 팬으로서 너무도 애착을 갖고 생각한 나머지, 원작자 이상으로 그 깊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만큼 세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게임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를 당당하게 중요한 라이벌로, 적수로 등장시키곤 하지만, 그 점이 결코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자도 그의 설정을 당당하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식 설정'으로 도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흔히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이 있을때, 그 원작을 바탕으로 창조된 작품들은 원작의 100%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팬'에 의해서 쓰여지기도 하는 그 작품들은 때때로 원작자도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보다 깊이 있는 감동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원작을 더욱 더 폭넓고 깊이 있게 느끼게 해 주기도 하지요.

 

  나카하라씨의 작품은 바로 그런 점에서 충실한 가능성을 느끼게 합니다.

 

  단순히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느끼게 해 주는 것 뿐만 아니라, 결국 그 깊이를 관철시켜 게임 제작자들이 채택하게 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카하라씨가 창조한 '카린'이라는 캐릭터는 꽤 좋아하는 편이지요.^^)

 

  결국, 그것이 팬픽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 아닐까요? (물론, 이들 작품은 '상업지'로 발매되었지만, 어차피 '원작이 있는 작품의 만화'란 그 작품을 좋아해서 만드는 만큼, 그 발상이나 내용은 팬픽의 완성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 마스터즈 재벌보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심지어 베가의 샤들의 기지를 날려 버릴만한 위성포를 소유한) 칸자키 재벌의 아가씨, 칸자키 카린. 사쿠라의 라이벌로서 단순한 부잣집 아가씨 이상의 포스(?)를 갖고 있다. ]

 

 

추신) 나카하라씨의 작품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괜찮게 생각하는 작품들은 있습니다.


  가령 "권아", "지저스" 등의 작가인 후지하라 요시히데씨의 "버추어 파이터". "권아"에서 팔극권의 이야기를 멋지게 펼쳐주었기 때문인지, 팔극권사 아키라의 캐릭터를 꽤 괜찮게 연출해 주었지요.(개그 컷도 괜찮은 편이었고...^^) 국내에는 해적판으로만 나왔습니다.

(국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스카 카스카베씨의 "럼블 로즈". 원작에 비해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은 느낌이 드는건 혼자 만의 생각? (물론 원작 자체가 스토리가 엉망이지만...^^;;)


  몬도 케이씨의 "아랑전설 스페셜". 기스 하워드와 볼프강 크라우저라는 두 보스가 동시에 등장하는 복잡한 이야기를 꽤 잘 풀었는데, 왠지 김갑환보다 그의 아내가 더 활약하는 느낌이 드는건? ^^ 해적판 말고 정식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지요.


  그리고 다케바야시 타케시씨의 투신전. 무난하게 볼 만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투신전은 2편짜리 애니메이션을 더 좋게 보았지만...)


  한편 애니메이션에서는... 별로 눈에 띄는게 없군요. "투신전" 외에 "킹 오브 파이터즈", "스트리트 파이터 알파(고우키의 이야기)" 정도? 최근에는 "스트리트 파이터 4" 게임에 동봉된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꽤 괜찮은 느낌을 주었습니다만.


  "용호의 권"은 영 아니었고, "스트리트 파이터 TV"판은 마음에 안 들고(TV판 "버추어 파이터"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뱀파이어 헌터"는 적당히 분위기를 살린 것 같고... "아랑전설"은 나름대로 괜찮은 듯 하지만 테리 보가드가 팔을 휘저으며 선풍권을 쓰는 시점에서 탈락... 뭐 그런 것 같습니다.


  여하튼 괜찮다고 하는 것도 정말 손꼽는군요. 하긴 그런 건 격투 게임 만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추신) 일반 게임 애니메이션의 수작으로 생각하는 건 "트윈비 파라다이스". 라디오 드라마로 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몇 편의 애니메이션에서 그들의 매력을 충실하게 보여주었지요.



추신2) 나카하라씨의 설정이 게임에 반영된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밖에도 영향을 많이 주었지만, 명확하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지요.)

 

1. 댄 히비키와 블랑카(지미)가 친구 사이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의 후일담에서 격투 중 떨어진 댄이 블랑카에게 구출되어 친구가 됩니다. 이후 게임에서 블랑카와 댄으로 진행할 때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2. 댄 히비키가 하루비노 사쿠라의 스승

  <힘내라 사쿠라>에서 공식적으로 설정되고 이후 게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하지만, 댄 히비키의 인기가 낮아선지 동인지나 4컷 만화 등에서 이를 부정하는 내용도 많습니다.

 

3. 칸자키 카린

  <힘내라 사쿠라>에서 등장한 나카하라씨의 오리지날 캐릭터. <스파 제로 3>에 출연했고, 이후 <SNK VS CAPCOM>이나 사쿠라 관련 스토리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댄 히비키는 그녀의 사부(?)이기도 하지요.

 

4. 겐류사이 마키

  파이널 파이트 2의 주인공으로 캡콤 캐릭터 중엔 상당히 마이너한(사실상 잊혀진) 캐릭터지만, <힘내라 사쿠라>에서 등장한 이래 지명도가 상승하여 <SNK VS CAPCOM>, <스파 제로3> 등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5. 류와 고우키의 관계

  <류 파이널>에서 류와 고우키가 부자 관계일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이후 게임에 반영됩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무협 이야기 2012.03.30 12:44



  아래서 소개한 닌자 어쌔신은... 사실 닌자의 이야기도 아니고 어쌔신의 이야기도 아닌... 작품 속에 흔한 악당 암살 집단의 이야기입니다.


[ 닌자를 죽이라고? 글쎄... 여기 어디서 닌자가? ( 닌자 어쌔신 / 워너브라더즈) ]

 

  어릴 때 아이들을 납치해서는 암살자로 기르는 조직에 속한 주인공이 암살 집단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대결하는 이야기지요.

  여하튼 피가 무진장 튀는 걸로 -그래서 나중에는 빨간 잉크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인데...

 

  문득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런 암살 집단이 어느 정도로 효과적일까 하고 말이지요.

  요즘 세상에 칼이니 사슬낫 같은 것을 가지고 싸우는 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저들은 정말로 암살자로 쓸만한 걸까요?

 

  이따금 여러 작품을 보면 굉장히 신비한 모습을 한 비밀 조직이 등장합니다. 대개는 휴대폰조차 터지지 않을 듯한 산중에 처박힌 그들의 기지는 전자제품이라곤 라디오 하나 볼 수 없고, 요즘 세상에는 도저히 정상이라 할 수 없는 패션 센스의 사람들만 득실거리곤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무술 수행에만 전념하며 "세계 정복"이니 "사회 정화"니 하며 이야기하지요.


[ 어둠의 세력이 숨어있는 사원. 인터넷은 고사하고 TV조차 있을 것 같진 않다. (배트맨 비긴즈 / 워너 브라더즈 ) ]

 

  생각해 봅시다. 요즘 세상에 인터넷의 O자는 고사하고 휴대폰이 아닌 전화의 ㅈ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과연 현대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요? <배트맨 비긴즈>의 브루스 웨인이야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 그 안에서 수련했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닌자 어쌔신>처럼 철모를 어린 시절에 납치되어 산속에 처박힌 아이들이 밖에 나온다면 과연 어떤 상황일까요?

 

  <풀 메탈 패닉!>이라는 작품에서는 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소년이 일본의 평범한(?) 고등학교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살아온 소년은 일반 상식을 단순히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만큼 그의 주변에서는 항상 소동이 끊이지 않습니다.

 

[ 좌충우돌. 그야말로 소동이 끊이지 않는 사가라 소스케. 다 좋은데 그 놈의 무기들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거냐? ( 풀 메탈 패닉 / 곤조 ) ]


  전투원으로서 그는 유능한 인물이고, 여하튼 전장에 파견될 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히 수련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많은 이들과 만나서 생활한 만큼 <닌자 어쌔신> 속의 닌자 어쌔신들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의 모습은 분명히 무진장 튀고, 상황은 엉망이 됩니다.


  한편, <내일의 요이치>라는 작품에선 평생 숲에서 아버지와 함께 수련만 하던 소년이 평범한 학교에 들어가 생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역시 소동이... (뭐 이쪽의 소동은 조금 핑크빛(?)이라는게 다르겠군요.)


[ 여학생들에 둘러싸인 요이치. 여하튼 면역력(?)이 없다는 점에서도 골치아픈 일일까? ( 내일의 요이치/ AIC )  ]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어떻습니까? 브루마를 만나자 마자 몸을 두드리면서 '너, 여자구나.'라는 상황...


  그래도 이들은 괜찮습니다. 사가라 소스케는 그 환경을 이미 밝히고 주변에서 이해(?)하는 상황이고, 요이치 역시 학교 생활을 보내는데 있어서 만큼은 큰 문제는 없겠지요. 손오공처럼 어차피 사회 생활은 생각도 않는 상황도 문제는 없겠지요.

 

  문제는... 사회 속에 잠입하고 대상에 몰래 접근해서 상대를 해쳐야만 하는 닌자 애쌔신 같은 이들입니다.

 

  검은 색의 옷은 원래 엄청나게 튀는 복장인데(생각과는 달리 밤에도 눈에 잘 띕니다.) 그런 복장은 제쳐두더라도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일 것 같지 않습니다. 왠지 말만하면 조선시대 말투가 툭툭 튀어 나올 것 같고, 신발을 벗고 택시를 타고, 변기에서 손을 씻을 것 같지 않습니까?


[ 아무리 봐도 평범한 행인 A로 밖엔 보이지 않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판 홈즈. 이렇게 자연스러운 쪽이 탐정일에도 어울리는 법이다. ( 셜록홈즈 / 워너브라더즈 ) ]


[ 눈 속이라면 조금 괜찮아 보일만한 복장. 하지만 이 차림으로 거리에 나오면... 그야말로 나 잡아달라고 사정을 하는 듯 하지 않나? ( 지아이조 / 파라마운트 ) ]


  그야말로 "너무도 수상해서 도리어 사람들이 눈을 돌릴 만한 느낌"... 그런 상황에 잠입이라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그들의 목적이 세계 정복이건, 사회 정화건, 아니면 단순한 암살이나 첩보 임무건... 사회를 잘 알고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야만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들어가는 것'은 오랜 기간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법입니다.

 

  KGB가 현지인 첩자의 양성에 애썼던 이유... 한편, 통신 위성에만 의존하던 CIA의 첩보력이 나날이 떨어지는 이유도 역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침략 외계인의 좌충우돌 코미디 <케로로 중사>에서는 닌자 소녀인 코유키(권설화)가 등장합니다.

  닌자 마을 출신의 그녀가 케로로 일행이 사는 마을에 오게 된 것은, 닌자 마을의 장로가 닌자들의 해산을 명했기 때문이지요.

  닌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평범하게 살아가게 되는데...

 

  당시 해산을 명한 장로는 시대가 바뀌어 평범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며 해산을 명합니다.

  그리고 MP3의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이렇게 말하지요.

 

  "앞으로는 모바일의 시대다!"


[ 닌자를 떠나 평범하게... 그것이야 말로 새로운 수업... (케로로 중사 11권) ]

 

  이런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코유키가 -이따금 이상하긴 해도- 평범한 소녀로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만큼 자연스레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고, 피(?)로 얼룩진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겠지요.

 

  반면, 조직을 나왔지만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던 닌자 어쌔신, 라이조는 결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한 끝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조직에 복수를... ^^


여담) 어쩌면 조직은 세상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이처럼 수용소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아는 닌자라면 조직의 명령을 잘 듣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세상을 너무 모른 나머지 세상에 나오자마자 택시 강도를 당해 활동 자금을 모두 빼앗기는 '간첩 리철진' 같은 일은 없어야 겠죠?


[ 간첩 리철진. 간첩이라면 모름지기 세상을 잘 알아야 함을 잘 보여줄까? ]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TAG 닌자, 무협
무협 이야기 2012.03.30 12:28

  정지훈(비) 주연의 영화 <닌자 어쌔신(ninja assassin)>은 서양에서 잘 알려진 암살자의 대명사 2개를 합친 기묘한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장군 제네럴'이나 '킬러 암살자' 같은 느낌일까요? 이런 기묘한 제목은 조금 황당하지만, '닌자'가 앞에 나온다는 점에서 그 존재의 유명세를 느끼게 하기엔 충분합니다.


  아래에 쿠노이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닌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 닌자 + 아사신. 암살자로 유명한 두 가지를 더한 이름 자체가 조금 황당하지 않나? (닌자 어쌔신 / 워너 브라더즈) ]

 

  닌자라는 존재가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역시 일본의 여러 영상물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같은데서 사무라이가 등장하고 닌자가 이를 뒷받침하는 장면은 매우 흔했고, 검은 옷으로 몸 전체를 가리고 어둠을 틈타 활약하는 그들의 모습은 '동양의 신비'를 기대했던 서양인(특히 미국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지요.

 

  '닌자가 돈이 된다.'라고 깨달은 일본에서는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먹혀들만한 닌자물을 만들어내었고, 이들에 빠져 버린 미국에서는 그들 자신의 작품에서 닌자를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 10대 돌연변이 닌자 거북이...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졌지만 영화도 있다. (미라지 스튜디오) ]

 

이런 애들이나...

 

[ 블록버스터 영화로 공개된 GI 죠에는 희고 검 두 닌자가 등장한다. (하스브로) ]

 

이런 애들입니다.

 

  거북이 닌자에 기관총을 들고 쏘는 닌자... 뭔가 특이한 느낌이지요?

 

  게다가, 닌자라는 요소는 -닌자 그 자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여러 작품에 영향을 주는데, 근래에 나온 <배트맨 비긴즈>에서 연출된 '배트맨의 탄생편' 같은 것에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처음에는 조로 같은 캐릭터였던 배트맨... 하지만, 점차 '닌자의 모습'에 가깝게 바뀌어갔다.  (워너 브라더즈 ) ]

 

  심지어 박쥐를 이용한 은신술까지 사용하니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사례를 보아도 닌자라는 존재는 세계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자연스럽게 정착된 느낌이 듭니다. 심지어는 외계인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에서조차

 

[ 외계인 닌자 도로로. 원래는 아사신이었다는 설정만 보면 '닌자 아사신'의 주역급이지만, 어릴 때의 트라우마로 '블루~~~'해 지는게 약점. (개구리 하사 케로로/선라이즈) ]

 

  이런 닌자가 등장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닌자라는 존재가 상품화되다보니 그 본래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잊혀진 듯 합니다.

  닌자의 모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는 것을 말이지요.

 

 

  우선, '닌자(忍者)'라는 말은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그 밖에 널리 알려진 시노비(忍び) 같은 단어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모두 후일 소설이나 만화에서 창작된 것이지요. (아래 포스팅에서 이야기했지만, 여자 닌자를 부르는 쿠노이치(くノ一 ->  이글자를 합치면 계집 녀(女)자가 됩니다.)라는 말도 <바실리스크~코가인법첩~>, <와이쥬엠~야규인법첩~> 등의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닌자물로 유명한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씨의 창작입니다.)


  그 전에는 이른바 '둔갑술'이라고 하는 인술(忍術)이라는 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인술사(忍術使い)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나, 이 역시 작가의 창작일 뿐, 실제로는 둔갑술이나 인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닌자라고 부르는 것의 원류는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랍파(乱破)', '톳파(突破)', '쿠사(草)' 등등. (우리말로 하자면 '수행자', '떠돌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어찌되었든 당초 닌자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떠돌이 승려나 장사꾼, 또는 무녀 같은 방랑자들, 혹은 사냥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풍습이나 지형에 익숙한 사냥꾼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가(伊家)나 코가(甲家) 같은 것은 이러한 이들이 모여서 정착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일반적으로 닌자라면 얼굴을 가리는 검은 옷을 입고 성에 몰래 잠입해서 지붕 위에서 밀담을 훔쳐 듣거나 상대를 암살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몇몇 입구를 빼면 완전히 밀폐된 일본식 성에 잠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대개는 거리를 돌아다니며(때로는 병사나 하인 등으로 위장하고 잠입해서) 소문을 수집하거나 반대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주 임무였습니다. (후일 ‘인술’이라 불리는 것도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변장하는 기술들을 말하는 것으로 불을 내뿜거나(화둔술) 물을 조종하는(수둔술) 등의 기술은 역시 창작입니다.)


[ 어둠은 고사하고, 먼 곳에서도 눈에 띄는 스톰 섀도우. 너 닌자 맞냐? (파라마운트 영화사) ]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전국(戰國)시대. 각지에는 많은 '임시직'이 존재했는데, 이런 임시직은 급료는 높을지 몰라도 위험하고 귀찮다는 점에서 토박이들은 꺼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많은 떠돌이들이 이런 일에 종사하곤 했고 그 중 상당 수가 첩자였던 것이지요. (전국 시대에는 신분증이라 할만한 것도 제대로 없었고, 떠돌이들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조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물론 떠돌이들이다 보니 호신용으로 무술을 배우거나 익히고 사용하는 사례도 많았지만,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싸움을 익히는 무사들과는 달리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실전 격투기가 중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사무라이들이 주로 쓰는 대도 같은 것은 매우 비싸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이 소지한 무기는 투박한 칼이나 몽둥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싸게 먹히는 맨손 무술을 이용하는 사례가 많아서 현재의 ‘고무술’이라는 것은 이들이 사용하던 기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복장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사냥꾼이나 떠돌이 승려, 장사꾼 출신이니 그런 직업에 어울리는 복장이 대부분이었지요. 특히 검은색의 옷은 매우 비싼데다 밤에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도리어 잘 드러나기 때문에 그냥 칙칙한 가죽옷을 입곤했지요. 물론, 때로는 진흙이나 재, 심지어는 변(X) 등을 묻혀서 위장하기도 했는데, 이런 위장이 바로 인술, 또는 둔갑술의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떠돌이 무녀나 예능인으로 활동한 여성들이 있었고, 이들의 복장은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게임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붉은 색이나 분홍빛 화려한 복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은 무진장 비싸고 관리도 힘드니까요.

 

  실례로 전국 시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여성 예능인(그리고 첩자로서도 활약한 것으로 여겨지는)인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国)의 초상은 이러했습니다.

 

[ 카부키의 창시자이자, 창기이기도 했던 이즈모노 오쿠니. 생각보다 옷차림은 수수했다. ]

 

  옷 여기저기에 붉은 색의 치장은 있지만, 그녀의 옷은 전반적으로 검은색과 흰색의 칙칙한 복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나마 신사에 속한 '유명한 예능인'인 그녀가 그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떠돌이 예능인의 복장에서 오늘날의 카부키 느낌을 찾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 울긋불긋한 가부키의 무대. 이는 극장 문화가 정착된 후대에서나 가능하게 되었다. ]

 

  후일 여자 닌자의 원류가 되는 떠돌이 무녀들도 수수한 복장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녀'라고 하면

 

[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무녀 모습 ( 클램프 ) ]


  이런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색깔은 둘째치고 이렇게 치렁치렁한 복장으로 먼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지요. (아니, 신사에서 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겁니다.)

 

[ 교토 헤이안 신궁에서 촬영한 무녀... 장식도 없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어서 일하기 편한 느낌. 무녀 매니아 입장에선 로망은 없을지도? ^^ ]

 

  당시는 전국 시대... 천 값도 비쌌고(더군다나 부드럽게 휘날리는 비단은 무진장 비쌌고) 염료는 더더욱 비쌌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저런 복장이 얼마나 낭비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주로 튼튼한 삼베옷을 입었고, 떠돌이 무녀들 역시 그랬습니다.



  이런 옷 말이지요. 하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글쎄요...?

 

[ SNK 게임의 히로인 시라누이 마이. 닌자라면서 저런 눈에 띄는 복장은 도대체 뭐냐? ( 아랑전설 / SNK ) ]


  당연히 게임이나 영화라면 모를까. 이처럼 화려한 차림의 여자 닌자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설사 돈이 많았다고 해도 이처럼 눈에 띄는 복장을 하는 것은 '밀정'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지요.)

 

  봉건 영주(다이묘)들이 경쟁하던 전국 시대, 특히 전국 시대 말기에는 닌자들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가니 코가니 하는 집단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정말로 이렇게 불리었는지 어땠는지는 알기 어렵지만(이들의 특성상 상당 수의 기록이 나중에 창작되거나 소문이 부풀려진 게 많았기 때문) 이른바 전문적인 집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주로 부업으로 ‘닌자업’을 하던 사냥꾼 집단(산인 山人)이 이를 본업으로 삼아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대로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전국 각지에 다양한 닌자 집단이 탄생합니다.

(전문적인 집단이라 하나, 그 결속력은 대단했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차피 떠돌이들의 집합체... 극소수의 핵심 인원을 제외하면 언제라도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요. (<나루토> 같은 작품에서 나오는 상급닌자(上忍)라는 것이 이들이지만, 역시 상급닌자(上忍)라는 말조차 후세의 창작입니다.)


  그래서 닌자 집단에서 활동하다 도망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근처에서 잡히면 본보기로 혼내는 일은 있었을지 몰라도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끈질기게 따라가서 처단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닌자 집단은 그런 추적자들을 동원할 정도로-아무 일도 없이 배신자 한명을 쫓는다는 이유만으로 공짜밥을 먹여줄 정도로- 돈이 많은 이들이 아니었거든요.)

  닌자에게는 감추어야 할 비밀 같은 건 없었고(설사 비밀-이를테면 다이묘와의 계약-이 있다고 해도 핵심 간부만 알고 있었으니) 그들을 추적해서 죽여야 할만한 이유는 전무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비정규군으로 군대와 함께 행동하면서 적진에 잠입하여 기밀을 캐내거나 암살, 방화 등의 일을 맡아 활약하게 되는데, 이들이 야사를 통해, 그리고 소문으로 변질되면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술을 사용하는 닌자’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다만 이들 역시 주 활동은 첩보라는 점에서 기존의 닌자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주특기는 역시 둔갑(변장) 같이 상대를 속이는 기술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주 목적은 역시 적진에 몰래 잠입해서 정보를 탈취하거나 방화 등으로 혼란시키고 도망치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요.


  “적과 마주치면 속이고 도망친다.” 그것이 닌자들의 기본 원칙이었고, 싸움 기술은 어디까지나 이를 돕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너무 수수합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이런 존재는 일본에만 있었던게 아닌 만큼 희귀성도 떨어지지요. 전세계 어디고 밀정이라는 존재, 또는 조직는 반드시 존재했지요. 판타지 세계에서도 '도적 길드'라는 이름으로 밀정 역할을 맡는 조직들이 나올 정도니까요. 실제로 봉건 시대만이 아니라 왕정시대에도 도둑과 계약을 맺고 첩자 등으로 쓰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판타지에 흔히 나오는 도적들. 바로 이들이 닌자의 진정한 모습이라 해도 좋다. ( 시프 3 / 에이도스 ) ]


  일본에서 유독 이런 이들의 활약이 많았던 것은 전국 시대라고 불리는 봉건 시대가 매우 길게 지속되었기 때문이며, 후일 이를 문화 상품으로 만들었기에 유명해진 것이지요.


  앞서 소개했던 야마다 후타로 같은 닌자물 전문 작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닌자라는 존재를 조연으로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작가들이 화려한 인술을 쓰는 닌자들(이를테면, 역사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쿠노이치 같은 존재)을 등장시키고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이들을 답습하면서 현재와 같은 ‘닌자’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닌자 어쌔신>에 나오는 듯한 닌자라는 존재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렇다곤 할 수 없습니다. 닌자의 원류가 어떻든, 그 본모습이 어떻든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닌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무엇이든 치장하기에 따라서 상품화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처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와서 우리나라에서 활약한 밀정들을 화려하게 치장해 봐야 '한국풍 닌자' 밖에는 안 될테니...


  그러니 반대로 닌자의 본 모습, 밀정의 본 모습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록, 그런 밀정으로는 <닌자 어쌔신>같은 작품은 만들수 없겠지만...

 

 

추신) <나루토> 같은 작품에서는 의사니 뭐니 하는 이들까지 닌자로서 등장하는데, 사실은 그쪽이 닌자의 본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거나 산에서 생활하다 보니 약초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기에 실제로 많은 닌자들이 떠돌이 약장수로 위장하곤 했으니까요.

  전국 시대에는 떠돌이 무녀나 승려, 약장수 등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이들 중 상당 수가 본업이건 부업이건 첩보 활동에 참여하는 게 보통이었다고 하고, 그 역시 닌자의 원류인 것이지요. (물론 그 중에는 원숭이 같은 동물을 조련해서 보여주거나 인형 놀이 같은 구경거리로 돈을 버는 떠돌이 예능인도 많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오쿠니도 그런 떠돌이 예능인 중 하나였지요.)


[ 나루토의 히로인(?) 사쿠라. 수수한 차림에 의술을 알고 격투술을 사용하는 그녀야 말로 진정한 여자 닌자의 모습일지도? ( 애니맥스 / TV 도쿄 ) ]


쿠노이치에 대해서는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 네이버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무협 이야기 2012.03.30 12:00

  근래에 들어 <나루토> 등으로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는 닌자... 그 정체는 사실 떠돌이 수행자들의 집단으로 여기저기서 소문을 모아서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닌자나 시노비라는 말이 사용된 일은 없으며, 둔갑술을 사용하는 닌자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후세인들의 창작에 불과하지요. (이를테면 <바벨 2세>, <자이언트 로보>, <철인 28호>의 작가인 요코야마 미츠데루씨 역시 다양한 둔갑술 대결로 닌자라는 존재를 대중화시킨 주역 중 하나입니다.)

 

  한편 닌자를 부르는 다양한 용어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이 여자 닌자들을 부르는 쿠노이치라는 말입니다. (쿠노이치(くノ一 ->  이글자를 합치면 계집 녀(女)자가 됩니다.)란 여자를 부르는 닌자들의 암호라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여자 닌자들 그 자체를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쿠노이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여기서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고있듯이 닌자라는 말은 후세에 소설가가 창작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쿠노이치 역시 일본 닌자물의 인기 작가,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에 의해 창작된 존재이지요.

 

  이야기에 앞서 야마다 후타로에 대해 잠깐 소개해 보자면...


[ 에도가와 란포 등으로부터 '전쟁후의 추리 소설 작가 중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라는 평을 받고 닌자물의 대가로도 알려진 야마다 후타로(1922~2001). 쿠노이치를 비롯 현재 닌자의 모습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22년에 태어나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초기에는 추리물과 시대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등 동료로부터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추리 소설가로 인정받은 것도 이 당시의 일이지요.)

  그 중에는 일본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각색한 작품(<요설태합전(妖説太閤記)> 등)들도 있지만 중국의 작품을 번안한 것도 꽤 되었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특징은 요괴나 술법 등 자신만의 색채를 넣어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퇴마록처럼- 만드는 것이 특징이지요.(이를테면 <금병매>를 각색한 <요이금병매(妖異金瓶梅)> 같은게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역사상 최초의 무협물이라 해도 좋을 <수호전>을 번안하기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108호걸들의 활약에 흥미를 느낀 그는 이들의 무술이나 술법을 참고하여 '인법'이라는 기상천외한 술법을 이용하는 닌자들의 활약상을 그리게 되지요. (그 전까지의 작품에서는 닌자라는 존재 자체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인법'이라는게 아니라 단지 '무술'이나 가벼운 변장술에 가까웠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 -국내에서는 <바실리스크~코가인법첩~>이라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진- <코가인법첩(甲賀忍法帖)>이라는 작품을 선보이게 됩니다.

(코가 닌자와 이가 닌자의 대결을 그린 이 작품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로 기상천외한 인법이 등장하며 물론, 여자 닌자들의 활약도 다채롭게 그려집니다. 다시 말해 <바실리스크> 쪽이 여러 작품에서 선보이는 쿠노이치의 원전인 것이지요. 다만, 이 시점에서는 쿠노이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았고, 이후 멸망한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를 지키는 여닌자들의 활약을 그린 <쿠노이치 인법첩(くノ一忍法帖)>을 쓰면서 처음으로 쿠노이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로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간 센히메와 그녀를 보호하는 토요토미의 후계자를 가진 사나다 일문의 여닌자들이 이가 닌자들의 공세에서 히데요리의 아이를 지키는 이 작품에서 여자 닌자들을 '쿠노이치'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가 닌자 중 한명이 여성의 정기를 흡수하여 여자로 변신하는 '쿠노이치 화장'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면서 '쿠노이치'가 여자를 부르는 닌자의 암호라고 이야기하지요.)


[ 국내에는 얼마 전에야 만화와 애니로 소개된 바실리스크. 하지만, 이거야 말로 닌자물의 원류다. ]


  <코가 인법첩> 이후 그는 <에도 인법첩>, <군함 인법첩>, <야구 인법첩> 등 속칭 '인법첩 시리즈'를 통해서 각종 기상 천외한 인법 대결을 펼쳐보이는데, 이들 작품이 지금은 <나루토> 등에서도 보여지는 닌자의 모습을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쿠노이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탄생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인법첩 이전에 그의 작품 속에서 원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요이금병매>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교묘한 속임수로 남성들을 속이는 여성'이나 '술법을 쓰는 요괴'의 모습이 바로 쿠노이치의 그것과 합치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시대극을 쓰면서 중국 문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가 <요재지이> 같은 작품에서 나오는 여우 요정이나 백사 요정 등에 흥미를 느끼고 야사 스타일 시대극을 쓰면서 일본의 설화(가령 거미 요괴 전설 등)를 함께 조사하여 이들을 연결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거미 술법을 쓰는 쿠노이치'나 '뱀의 환각을 이용하는 쿠노이치' 등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과거의 여러 설화 속에 나오는 요괴에 <수호전>에 등장하는 호삼랑 등 여성 협객들의 분위기를 합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쿠노이치'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그는 고작해야 단역에 불과했을 여자 밀정들에게 호삼랑 같은 무술과 요괴 같은 술법들을 주어 '쿠노이치'라는 존재로 완성한 것입니다.

(실례로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쿠노이치들은 -아니 쿠노이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닌자들이- 칼을 들고 싸우기보다는 변신술이나 최면, 환술 같은 기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쿠노이치 인법첩> 같은 작품에선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야스의 명을 받은 이가 닌자와 사나다의 여자 닌자들이 각종 술법(인법)으로 서로를 제거해 나가지요. 독침으로 정기를 빼앗겨 죽어가면서도 '인법'을 써서 상대의 정체를 밝히고 쓰러뜨리는 장면 등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야규 주베이를 주역으로 한 <야규 인법첩>에서는 야규 쥬베이가 검술을 사용하고 적인 아이즈 칠번창 역시 무술을 쓰지만,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호리 일족의 여성들은 주로 속임수를 이용해 훨씬 강한 아이즈 칠번창을 하나씩 무찌르지요. 닌자의 인법이라는 것이 무술만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무술보다도 머리를 쓰는 쪽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찌기 <금병매> 등을 번안했던 야마다 후타로가 이 과정에서 쿠노이치에게 선정적인 요소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선정적인 요소는 이는 당시 일본의 추리 문학이나 시대극의 대세이기도 했고, 그가 참고한 것으로 생각되는 <요재지이> 같은 요괴물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닌자물 자체가 대중적인 오락 소설로서 탄생한 이상, 쿠노이치라는 존재가 속칭 '여성의 상품화'와 연결되는 것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야마다 후타로의 각종 작품을 V 시네마로 만들때 항상 선정적인 요소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마다 후타로씨의 원작에 담긴 품격과 완성도는 현격하게 떨어지는게 문제죠.)

 

  하지만 적어도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 닌자, 쿠노이치들이 무조건 선정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화된 작품에선 그런 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지만, 원작 속의 쿠노이치들은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이루려는 당당한 존재들입니다.

 

  '닌자'라는 직업에서 대등한 존재이기도 한 그녀들은 남자 닌자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며, 때로는 주역이지요.


[ 여자 닌자의 대표격인 시라누이 마이. 사실 이 모습은 이후의 많은 작품이 선정적으로 왜곡한 닌자상에 더욱 가깝다. ] 


  <아랑전설>의 시나누이 마이 같은 캐릭터로 인해 쿠노이치는 모두 선정적이라는 인상을 받기 쉽지만, 그녀들은 몸을 무기로 쓸지언정 시라누이 마이처럼 이른바 상품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SNK VS CAPCOM>에서는 시라누이 마이를 처음 본 캡콤 팀에서 '닌자라면서 저렇게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하다니 이상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죠. 일부 만화를 보면 시라누이 마이의 복장도 단순히 선정적인 목적보다는 상대를 현혹시키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왜냐하면 그녀들은 나름대로 그녀들 자신이 믿고있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져버리기도 하는 -수호전에서의 호삼랑과 같은- '호걸'이자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고 그것을 무기로 쓸지언정, 그녀들은 -<아랑전설>의 마이처럼- 남자 닌자들의 들러리나 눈요기 거리로 나오는게 아니라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처럼 당당하게 제 역할을 하는 주역이니까요.


[ 싸우는 여성의 대표가 된 춘리. 전사이자 인터폴 형사로서 잠입임무도 거뜬히 수행하는 그녀야 말로 쿠노이치에 가깝다. ]


  근래에 만화로 완결된 <야규 인법첩>에서 주역은 야규 쥬베이지만, 무적이라 해도 좋을 그가 위기에 빠졌을때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는 것은 바로 호리 일족의 여성들을 비롯한 '쿠노이치'입니다.

  만화에서도, 원작에서도 몸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녀들이지만, 그것은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아이즈 칠번창이라는 강적과 40만석 다이묘인 가토 가문에 대항하여 복수를 이루고, 그들의 간악한 행위로부터 많은 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각오의 표출이지요.

 

  적어도 인법물의 대가인 야마다 후타로씨가 처음 완성한 '쿠노이치'의 모습은, 그리고 닌자의 모습은 바로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이상적인 닌자와 쿠노이치의 모습일지도 모르지요.

 

  때로는 여성으로서 몸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무 수행을 위해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는 여걸... 그리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영웅...

 

  그런 점에서 요 근래의 많은 닌자물에서 쿠노이치가 오직 선정성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추신) 야마다 후타로씨의 작품은 영상화, 만화화된 일이 많지만 원작만큼의 평가는 받지 못하는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싸구려 배우들을 내세워 오직 선정적인 것만을 내세우면서 원작의 깊이를 충실히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근래에 세가와 마사키씨가 선보인 <바실리스크 코가 인법첩>이나 <와이쥬엠 야규 인법첩> 등은 원작의 품격을 충분히 살려주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매우 일찍부터 컴퓨터를 사용해 왔지만 그럼에도 수묵화를 연상케하는 굵고 거친 선에 독특한 그림체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그의 그림과 충실한 연출 솜씨가 있었기에,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이 TV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 성과를 거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리지날 작품이었던 <귀참십장>에서도 꽤 마음에 들었는데,  <바실리스크>나 <와이쥬엠>에서는 더욱 성숙하고 완성된 느낌을 주니까요. 앞으로도 그가 야마다 후타로의 다른 작품들을 꾸준히 내 준다면 좋겠네요. (사실 제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실리스크> 덕분이었습니다. 지금에야 인법첩을 원작으로 다 보았기에 결말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만화로 그려진 작품은 또 다른 맛이 있지요.)


[ 세가와 마사키씨가 그린 야규인법첩. 야마다 후타로 작품의 품격을 충실하게 살려주었다. ]

 

여담) 닌자물이 널리 알려진데는 <바벨 2세>와 <철인 28호> 등의 작가인 요코야마 미츠데루씨도 활약도 큽니다.

  이를테면, <삼국지>, <수호전> 등 시대극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야마다 후타로의 <코카 인법첩> 등의 영향을 받아 <이가의 카케마루>라는 작품을 선보이는데, 이를 통해 닌자들의 싸움 대결을 흥미롭게 연출하여 특히 소년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요.(<바람의 검심> 등에서 나오는 닌자 등은 야마다 후타로씨보다는 요코야마씨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닌자물은 주로 기상 천외한 술법을 바탕으로 속임수 대결에 가까운 야마다 후타로의 스타일과는 달리 서부의 무법자처럼 정면에서 적과 대결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이는 그가 즐겨 보았던 <삼국지>나 <수호전> 같은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야마다 후타로의 닌자들이 대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상대를 속이거나 속은 척하며 다시 속이는 환술 대결을 통해서 상대를 없애는 쪽이라면, 요코야마씨의 닌자들은 그야말로 대낮에 평원에서 드러내놓고 칼부림을 벌입니다. 수많은 닌자들이 결전을 벌이는 장면은 가히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며, 적의 닌자들을 피해 돌진하는 모습은 장판파에서의 조자룡을 연상케하죠.

  이렇듯 수많은 닌자 군단을 헤치고 탈출하거나 적의 대장과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닌자 대결 등의 연출은 이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는데, 이를테면 <플루토>라는 작품으로 리메이크된 <철완 아톰 지상 최대의 로보트 편>이나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사이보그 009>, <가면 라이더> 같은 작품은 바로 요코야마씨의 닌자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드래곤볼> 같은 작품도 역시 요코야마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009의 가속 장치는 바로 요코야마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닌자의 축지법'을 SF 관점에서 새롭게 만든 것이지요. (요코야마씨의 작품 이전만 해도 축지법을 쓰는 닌자라는 것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야마다 후타로씨의 작품에 나오는 닌자들도 몸놀림 자체는 빠르지만 사실상 가속 장치를 달고 있는 듯한 묘사는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각종 초인물들은 요코야마씨의 닌자물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요코야마씨 자신도 닌자를 초능력자로 바꾸어 <레드 마스크>를 시작으로 <바벨 2세>, <지구 넘버 V> 같은 초능력자물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로보>에서는 공명 등 <삼국지>의 인물에 공손승이나 번서를 시작으로 하는 <수호전>의 호걸들만이 아니라 노귀나 아카카게(마스크 더 레드), 혈풍련 같은 닌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사들이 모두 '초능력자'로 등장하는데,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일찌기 요코야마씨 자신의 창작한 초능력자들이나 그들의 초능력은 -염력 등 일부를 빼면- 모두 술법을 사용하는 닌자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은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에 <수호전>이나 <삼국지>의 호걸, 영웅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쿠노이치라고 할 수 있는 '여자 초능력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애니메이션판 <자이언트 로보>에서 청면수 양지를 여성으로 바꾸어 등장시켰을까요.


여담) 이제보니 야마다 후타로의 고향인 효고현에 그의 기념관이 있군요.(입장료도 받습니다.) 대중적인 소설가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당당하게 세워지는 일본의 분위기가 꽤 부럽습니다. (데츠카 오사무, 요코야마 미츠데루, 이시노모리 쇼타로 같은 만화가의 기념관도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김소월씨 같은 분의 기념관조차 없는게 현실이니... (한때 설립을 계획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무소식입니다.)


(* 네이버 블로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