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이야기 2016.10.31 21:49

  저는 한국 SF에서 팬이나 작가, 그리고 시장도 부족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부족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안타깝지만, 한국 SF 분야에서는 '전문가 풀'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으며(이걸 제시할만한 협회나 기관도 없습니다만.) 설사 있다고 해도 여기에 등록할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공 기관에서 인정하는 방식을 적용한다면 말이죠.


[ SF 어워드 2015 행사. ]


  그러다보니 심사 위원으로서 항상 똑같은 분을 보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현재 한국 SF 분야에서 이런 쪽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대중이나 관청에서 바라볼 때는 말이죠.


  SF 어워드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항상 같은 분들이 심사를 맡느냐?'

  '왜 다른 SF 작가 같은 분들은 심사를 맡지 않느냐?'

  '왜 SF를 모르는 분들이 심사를 맡느냐?'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대중이나 관청, 아니면 기관에서 생각하는 SF 전문가의 폭이 매우 좁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그 결과 심사는 항상 같은 분들이 맡고, 조금만 심사위원의 폭을 넓히려고 하면 뭔가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SF 어워드처럼 '기성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상은 어떻게 심사하는게 좋을까요?


  이에 대해 생각하기 위하여 저는 미국과 일본의 수상 시스템(물론 중국도 포함)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는 SF에 대한 여러가지 상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상이 매우매우매우 많지만,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1. 미국 : 휴고상, 네뷸러상


2. 일본 : 성운상, SF 대상


3. 중국 : 중국성운상(중국인 성운상), 은하상


  이들 상을 선정하는 기관이나 단체,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이들의 선정 방식은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SF 잡지(과환세계)에서 선정하는 '은하상'을 제외한 여러 상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합니다.



1) 특정 기관, 단체에서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


2) 결선 투표, 또는 결선 심사로 최종 작품 선정



  예를 들어 네뷸러 상은 미국 SFWA(SF 작가 협회)의 협회원들이 투표로 선정합니다. 물론 작가 협회에 속하지 않은 작가 작품도 대상이 됩니다.


   네뷸러상과 비슷한 것이 일본의 SF 대상입니다. 일본 SF 작가 협회의 협회원들이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성운상과 휴고상, 그리고 중국 성운상은 팬투표에 의해서 후보작이 선정됩니다.


  휴고상은 월드콘에 등록한 사람들이 1차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월드콘에 등록할 때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실제로 대회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성운상은 일본의 '팬 그룹 연합회'에 소속된 팬 그룹에서의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중국 성운상도 중국의 팬 투표를 거쳐서 후보작을 선정합니다.


  이렇듯, 대다수 상은 작가나 팬에 의한 단체 투표로 1차 후보작을 선정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선정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휴고상, 성운상은 모두 월드콘과 일본 SF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팬 투표가 진행됩니다. 각각의 행사는 참가비가 낮지 않습니다.(게스트는 예외) 다시 말해 그만큼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팬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기상'의 성격이 가장 강하게 드러납니다.


  네뷸러상과 일본 SF 대상은 다시금 작가 협회 회원들의 투표로 최종 작품이 선정됩니다. 작가 협회는 보통,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인기상'보다는 '작품상'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물론 본인의 작품에 투표하는 건 금지됩니다.)


  중국 성운상은 뽑힌 후보 중에서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에 의한 선정을 거쳐서 뽑힙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수상 대상이 매우매우매우 많다는 거죠. 이를테면 SF 단체에 수여하는 단체상이라던가, 신인상, 공로상에 특별 공로상이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중국 성운상과 은하상을 제외하면 대다수 SF 대상은 '단체 투표'에 의해서 선정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단체 투표' 방식에는 단점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작품성은 좋지만,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은 선정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팬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선정하는 인기상 형태의 휴고상, 성운상은 그래도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단순히 '베스트셀러상'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를 보완하고자 각각의 상은 모두 2차례 이상의 투표 과정을 거칩니다. 첫번째 투표는 1~3월 정도에 진행되고 후보 발표를 거쳐, 두번째 투표가 5월 정도에서 행사 당일까지 진행합니다.


  즉, 첫번째 투표를 통해서 후보작을 소개함으로써, 어떤 작품을 뽑을지 알릴 시간을 준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SF 작가라고 해도, 그리고 10만원, 20만원씩 내면서 행사에 참여하는 SF 팬이라도 후보작 모두를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후보작을 소개하면 그것만으로도 해당 작품들을 접하기 위해 노력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적어도 10만원, 20만원씩 내면서 SF 행사에 참여하는 팬이라면 5~6작품의 후보작은 다 사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여기에 휴고상이나 네뷸러, 성운상과 SF 대상 같은 상들의 개성과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위원이 따로 없기 때문에(물론 투표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관리 위원회도 있습니다.) 어느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작품이 선정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원이 제한되다보니 단체표에 의한 부정이 없다고 볼 수 없겠지만, 그게 수천명에 이르게 되면 아무래도 쉽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SF팬들이, 또는 SF 작가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이 선정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후보작 자체가 먼저 알려지게 되고, 이를 투표해야 하는 만큼, 사람들이 사전에 그 작품을 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상은 '후보작'에 오른 것 만으로도 판매량이 대량으로 증가합니다. 휴고상이라면 3000여명의 팬들, 성운상이라도 1000여명의 팬들이 그 작품들의 구매 후보자들이니까요. 게다가 후보작이라는 이야기는 설사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그 책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 됩니다. (이 자체가 작가에게는 '인세'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일본 SF 대상처럼 스폰서가 있는 상은 상금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 상을 '팬들'이나 '작가들'이 함께 뽑는 기분을 준다는점입니다. 우리가 뽑은 작품, 우리가 추천한 작품이 되는거죠.



[ 휴고상을 받고 기뻐하는 작가들. 왼쪽부터 데이브 하트웰, 찰스 N. 브라운, 코니 윌리스. ]


  휴고상이나, 네뷸러상, 그리고 성운상과 일본 SF 대상이 시작될 때 제각기 '공정성'에 대해서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사위원이라는 소수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팬의 힘, 작가의 힘을 믿었습니다.


  SF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면, 그 후보작을 모두 사서 보고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 상은 각각 그 나라에서 SF 부문의 권위가 되었습니다.



  작가가 심사를 맡는게 마땅하다면, 한 두명의 권위있는 작가가 아니라, 수십 명의 작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팬이 심사를 맡는다면, 몇 명의 권위있는 팬이 아니라, 수백, 수천명의 팬이 함께 참여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 한명의 팬이 만들어낸 '암흑성운상' 시상식. 행사 그 자체에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시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그럼으로서 SF 시상식은 축제가 됩니다. 여럿이 웃고 즐기며 함께 SF를 보고 노는 잔치가 됩니다.


  즐거운 자리가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오래 머무르고, 더 새로 찾아오게 됩니다.



  좋은 SF를 고르는데, 권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SF는 심각하고 고민하며 보는게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게 보는 것이니까요.


  성운상 처럼 라이트 노벨도 선정될 수 있고, 휴고상처럼 판타지도 -SF팬이 보기에 재미있다면- 뽑힐 수 있는 상.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그런 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SF 인기상'이 될 수 있을테니까요.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SF 이야기 2016.10.30 15:59

  과천 과학관에서 SF 어워드가 끝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심사위원에 대한 논의가 눈에 띄는군요.


  과천 과학관 SF 어워드 심사 위원은 본래 5명이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1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심사위원에 부담이 많다는 문제(이를테면, 올해 단편상의 심사 대상은 100편이 넘습니다. 기존에 상을 받은 작품 같은 걸 모두 제외해도 말이죠.)도 있지만, 그보다는 심사위원의 숫자가 적으면 그만큼 의견이 편중될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전부터 이야기가 되었고, 작년 말과 올해 초 SF 어워드에 대한 자문 회의가 있을 때에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15명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심사위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과천과학관의 상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습니다. 특히 소설 부분의 심사 위원 선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SF 작가나 출판 관계자는 어렵습니다. SF 어워드는 공모전이 아니라 실제 나오고 있는 작품에 관련된 상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 해에 작품을 쓰지 않거나, 출판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능한 제외해야 겠지요.(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이 선정되는 시점에서 대상 작품이 모두 선정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작가들과 친분 관계가 깊은 사람들도 제외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과학관이라는 공공기관인만큼 특히 이런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뜻에서 서점 관계자도 제외하는게 좋을 겁니다. 번역만 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숫자가 적습니다.


  그러면 주로 평론가라던가, 해당 분야의 활동자로 한정됩니다. 그것도 과학관에서 인정할만한 경력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단체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거나, 대중언론(신문, 잡지)에 꾸준한 활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대학교의 교수나, 관련된 박사 학위를 갖고 있거나...


  안타깝지만, 대한민국 SF 분야에서 이러한 분은 몇 안 됩니다. 1회부터 심사위원을 맡아온 박상준님, 고장원님 정도죠.(과거에는 홍인기님이나 김상훈님 같은 분도 계셨고, 교수나 박사 쪽으로 생각하면 좀 더 넓힐 수 있습니다만. 일단 활동이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 두 분을 빼고 SF 관련 책을 낸 분이 얼마나 있나요?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분들은? 웹진을 포함해 SF 전문 사이트/블로그조차 거의 없고, 커뮤니티도 하나 뿐입니다.


[ 도서관에서 촬영. (출처 : http://mirror.pe.kr/index.php?mid=webzine6&category=28262&document_srl=28987 )

http://mirror.pe.kr/index.php?mid=webzine6&category=28262&document_srl=28987  ]


  박상준님은 오래 전부터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오멜라스 출판사, 월간 판타스틱 등을 준비하기도 했고, 영화제 진행에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SF 분야에서는 가장 발이 넓지만, 그만큼 활동도 많은 분입니다. SF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SF의 역사 자료를 충실하게 갖추신 분이기도 하죠. 대학교에서 대중과학 관련 강의도 하고 계시고요. 너무 활동이 많다보니 최근에는 잡지나 신문 기고 이외에는 저술 활동이 없으신 게 참 아쉽습니다만...


[ 발표 중인 고장원님. ( 출처 : http://imnews.imbc.com/fullmovie/fullmovie05/child/2665783_6631.html ) ]


  고장원님 역시 많은 활동을 한 분입니다. 이전부터 여러 강연, 강의에 참여하셨고, 일찍부터 다양한 책을 쓰셨으며, 지금도 책을 내고, 신문, 잡지 등에 SF 기사를 쓰고 계십니다. 적어도 저는 SF 소설 분야에서 고장원님만큼 깊이 아는 분은 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참고할만한 소설이 있나?’라고 물어보자, 그 자리에서 그와 관련한 여러 작품 얘기를 하면서 왜 그 작품이 좋은지 한참동안 이야기 하시더군요.


  요즘의 SF 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터넷만 검색해 보면 압니다. SF와 관련하여 최근 언론에 이름이 나오는 것은 –작가를 제외하면- 이 두 분, 아니면 저 뿐입니다.


  제 이야기가 나왔네요. 저는 PC 통신 시절 활동도 있었지만, 인터넷상의 SF 모임을 만든 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SF&판타지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한지는 8년째네요. 동인지를 몇 번 만들고, 미래경이라는 잡지를 4번째 출간. 단편집을 두 권 기획해서 냈습니다. 주로 게임 쪽 책을 냈지만, 최근에 판타지, 그리고 SF 쪽의 책을 냈고 양쪽 다 새로운 책들을 쓰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최소한의 기준’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SF 분야의 전문서는 고작 1권 밖에는 내지 못했고, 대중언론에 기고한 원고도 몇 개 안 되기 때문입니다.(사실 제 경우는 소설 부분의 심사위원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희망하지만, 저는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는 단편집 ‘조커가 사는 집’과 ‘미래경 4호’의 출판 관계자거든요. 그게 아니라도 여러 출판사와 협력 관계에 있거나 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 것으로는 충분한 자격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고료를 받고 자기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돈을 내고 산 독자들에게 칭찬이나 욕을 들어봐야 합니다. 블로그에 평을 많이 쓴다고 해서 평론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블로그 운영을 몇 년씩 한다고 해서 프로로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원고료를 받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으면, 프로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그것도 친분 관계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글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는 그러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를 포함해도 한줌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더 많은 SF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SF 팬들만, 친구들만 인정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대중이 인정하고 대중 언론이나 공공기관에서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SF 어워드 심사 위원 후보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 SF는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번 SF 어워드에서 단편 심사 대상이 100편을 가볍게 넘고 있으며, 장편도 적지 않습니다. 만화나 드라마, 영화 같은 다른 미디어 작품이 많지 않은 건 아쉽지만, 그 역시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그만큼 SF인들 사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더 큰 목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SF 블로그도 더 늘어나고, 커뮤니티도 많이 만들어지고, 잡지가 없다면 웹진이라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목소리가 다채롭게 흘러나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팬들이 모여서 떠들고 놀 수 있는 행사가 열리고, 모임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 북적대는 분위기의 SF 어워드 2014. 공공기관에서 이런 행사를 열 수도 있지만, 팬들 자신이 열 수 있어야 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 동네는 왜 저렇게 웃음이 가득한가?’라고 궁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SF는 재미있는 겁니다. 즐겁고 흥미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만 즐기고 혼자 노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 할 때 더 좋은 것이죠?


  이를 위해서도 내년에는 더 많은 SF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오래 전 한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울티마나 바즈테일 같은 게임에 빠졌던 저는 화려한 그래픽과 스토리 연출을 제공하는 게임에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던전을 탐험하던 중, 갑자기 강제 전투가 벌어졌죠. 적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쉬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던전 안에서 생명력과 마력은 꽤 떨어진 상태였고 회복약은 많이 소비한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투지에 불타는 저는 마음을 다잡고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회복약으로 생명력을 회복하고 디버프를 걸고, 버프로 능력을 높이면서 맞서 싸웠죠. 분명히 효과를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무리 때려도 잘 맞지 않고 적이 때릴 때는 100발 100중. 게다가 한방에 죽기 일보 직전... 결국 회복약을 모두 써 버리고 회복시킬 마력도 떨어진 상태에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으음... 분한 일입니다. 기어코 이기고 말겠다고 다짐한 저는 일단 데이터를 불러냈고(로딩), 레벨을 열심히 높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어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던전의 몬스터 따위는 가볍게 물리치게 된 시점에서(당연히 잡아봐야 경험치도 거의 안 나오는 상태에서)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렇게 두번쯤 반복했을까요? 결국 게임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뭐 이런 개x 같은 난이도가 다 있어."라면서 말이죠.


  얼마 후, 저는 우연히 그 게임의 공략집을 보게 되었고 깨달았습니다. 그 전투는 설사 제가 최고 레벨로 높여도 이길 수 없는 전투라는 것을. 스토리상 무조건 패배하고 사로 잡힌 후에 탈출하여 특별한 아이템을 얻은 후에 다시 도전해야 하는, 그런 전투였던 것입니다. 보스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 그야말로 '절대 무적 보스'였던 것입니다.


  그 후 공략집을 보면서 다시 도전해서 완수하였고, 그후엔 비슷한 상황의 게임이 나올때마다 일단 스토리상 이길 수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조금 싸워보면 알긴 하지만,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 처음부터 포기하고 맞아 죽는게 훨씬 나았으니까요.


  왜 이렇게 질수 밖에 없는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일까? 재미있게 즐기면서도 그런 의문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 그래요. 차라리 순순히 금을 바치고 말겠습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거라면. ]


  그러던 중 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려면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고 실패시키면 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흔히 실패는 패배이자 절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인공이 실패하고 위기에 빠지면서 그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때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는 거죠. 


  실패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주인공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공에 기뻐하게 됩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보는 동안 -대리만족이란 느낌으로- 재미있게 느낄지 모르지만, 다 보고난 후에 감동이 없고 공허한 느낌을 받습니다. 시련도 위기도 실패도 없는 이야기는 진실미가 없고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게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확실히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거나 실패할 때 조마조마하고, 초조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했을 때 주먹을 쥐면서 기뻐하기도 하죠.


  ‘절대 무적 보스’는 분명 그런 목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인공, 플레이어 캐릭터가 실패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그려내기 위해서...



  그런데 정말로 그게 필요한 것일까요? 절대 무적 보스는 이름 그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HP가 무한대이거나, 방어력, 또는 회피율 무한대라서 설사 최종 보스를 이길만한 실력이 있어도 이기지 못합니다. 회복약을 사용하고 버프나 디버프로 능력을 높이는 건 죽는 시간을 연장시켜 줄 뿐. 가치가 없습니다.


  게임을 진행하는 플레이어는 그게 절대 무적 보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싸우고 죽은 뒤에, 스토리가 나온 다음에야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죠. 아니면 저처럼 공략본을 보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보람’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허탈함, 분노만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스토리로서의 매력이 아니라, 불편한 시스템, 혼란한 시스템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분명히 실패 후에 극복이라는 스토리텔링의 원칙을 적용한 것인데, 왜 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건 게임이, 영화나 소설처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관객처럼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직접 캐릭터를 조종하여 시련에 맞서고 대결합니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눈앞에 놓인 장애는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든 깨뜨릴 수 있고 넘어설 수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보자마자 그것이 ‘불가능한 장벽’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뛰어넘으려 합니다. 한 번에 실패하면 다시, 다시, 그야말로 넘을 때까지 도전하거나 결국 포기합니다. 나중에 그것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시스템 상의 장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시련을 극복하는 보람’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 지옥 같은 난이도로 유명한 마계촌. 물론 이걸 하는 건 플레이어의 선택이죠. ]


  설사 한번 그것을 체험하더라도 다음 번에 같은 경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했는데, 그냥 죽어 버리는 상황도 있을 겁니다. 분명히 절대 무적 보스라고 생각하여 포기했는데, 허무하게 게임 오버를 맞이했을 때 역시 기분이 좋지 않겠지요. 죽은 다음에 다시 도전한다고 해 봐야 ‘시련을 극복하는 캐릭터’는 되지 않을테니까요.


[ 이 상황에서 이어서한다고 해서 '실패의 극복'이 되진 않겠죠. ]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픈 월드 게임으로 유명한 GTA5에서 한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젊은 흑인 청년 플랭클린과 중년의 백인 남성 마이클입니다.(사실은 1명 더 있습니다만) 플랭클린이 어쩌다 마이클과 친해져서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속옷 차림에 달아나고 마이클이 쫓아갑니다. 플랭클린에게 차를 운전하라면서 말이죠. 마이클이 자기 아내와 테니스 코치가 바람 피는 것을 발견하고 복수하러 쫓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코치를 추적하여 아주 과감한 짓을 벌이죠. 바로 벼랑 끝에 튀어나온 집의 기둥을 자동차로 당겨서 무너뜨려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 집은 코치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마피아 카르텔의 보스 정부의 집이었던 것이지요. 부하들이 추격을 하고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한 명은 운전하고, 한 명은 총으로 응사하며 도주에 성공. 집에 돌아오지만, 카르텔의 추격자는 결코 따돌리지 못했습니다.

  보스가 부하들과 함께 찾아온 것입니다. 자 이게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카르텔의 보스와 맞선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무기 하나 변변히 없는 상황에선 말이죠. 과감하게 싸워서 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플레이어가 보스에 맞설 방법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돈을 내놓으라.’라는 말을 듣게 되죠. 마이클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돈을... 이래서 GTA5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 카르텔의 보스한테 덤비면 죽는다는건 싸워보지 않아도 알게 마련이죠. ]


  마이클에게 있어 보스는 ‘절대 무적 보스’입니다. 싸운다면 반드시 패할 적수죠.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패할 적수, 헛수고를 시험해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중요한건 여기서 일단 굴복한 마이클이 보스에게 엉망으로 깨지고 나중에 복수한다는 사실이지, 그에게 엉망으로 깨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걸 게임 플레이로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롤플레잉 게임의 ‘절대 무적 보스’도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그냥 스토리로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끝내면 안 될까요?



  게임에는 두가지 실패가 있습니다. 하나는 플레이어의 패배, 또 하나는 캐릭터의 패배입니다.


  마피아 보스와 이길 수 없는 싸움 끝에 패배하는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잘못이자 패배입니다. 분명히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플레이어는 그 사실을 모릅니다. 결국 전투에 패했으니 -제 아무리 스토리상 정해진 것이라도- 플레이어는 자기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스토리상의 패배라고 납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열심히 싸웠음에도 패배한 것이니까요. 아무리 그 뒤에 주인공이 사로잡히고 탈출하는 스토리를 둔다고 해도(또는 마왕이 ‘흥, 별거 아니군.’이라며 놔준다고 해도)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고 찜찜하겠죠.


  반면 적의 보스에게 아군이 사로잡히거나 하는 것은 캐릭터의 실패입니다. 이건 이야기 흐름상 존재하는 것이고 플레이어가 잘못한 결과물이 아니죠.


  캐릭터는 대개 죽지 않으며(죽었다가 부활하기도 하지만) 플레이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됩니다. 플레이어 역시 실패한 사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캐릭터 플레이를 이어갑니다.(물론 게임이 어렵다며 던져버리지도 않습니다. 가끔 '개X같은 스토리'라면서 욕하고 내던질 수는 있지만 말이죠.)


[ 스토리에 의해 갇히면 당연히 누군가가 구조하러 등장하게 마련이죠. ]



  스토리상 캐릭터가 실패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좌절하지만 결국 이를 극복하고 다시 도전하여 최종적으로 성공한다는 점에서 영화나 만화, 소설 등의 실패와 비슷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 캐릭터의 패배와 극복은 분명히 플레이어의 잘못이 아니며, 플레이 결과가 아님에도 플레이어는 자신이 직접 패배하고 극복한 것처럼 희열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나 소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느낌은 존재하겠지만, 게임 캐릭터의 그것은 훨씬 더 강렬한 체험이며 더욱 몰입되게 합니다.


  그것은 게임의 캐릭터가 내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 잘못으로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의 실패는 내 실패처럼 여기며 안타까워하고 초조해하며 아쉬워합니다. 설사 그것이 스토리상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죠. 그리고 실패를 극복하고 성장하면서 성공할 때 마치 내가 성공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영화와 달리 내 선택에 의해서 진행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몰입감, 만족감입니다.



  다만 이를 잘 구성하려면 캐릭터의 실패와 플레이어의 실패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스토리상의 실패와 플레이의 실패가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이죠.


[ 이길 수 없는 보스는 그냥 스토리 요소입니다. ]


  패하게 되어 있는 전투를 굳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해봐야 공격은 전혀 먹히지 않고(먹혀도 금방 부활하고) 허송 세월만 하는 거니까요. 아무런 보람이 없는 플레이, 그냥 시간만 죽이기 위한 플레이... 그럼에도 플레이어는 '혹시라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정신력을 낭비합니다.


  결국 '인터넷'이라는 반칙기를 쓰고서야 알게 되죠. 그건 원래 그렇다는 것을... (그래요. 사실은 예전에 제가 그런 적이 있었답니다.(그땐 인터넷이 아니라 공략집이라서 더 찾기 힘들었지만.) 그때의 허탈한 마음이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정당한 플레이가 아니라 플레이어를 고문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패배가 확정되어 있다면, 회복약에 폭탄에 잔뜩 써가면서 싸우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벤트 장면으로 패배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고, 플레이어도 훨씬 부담이 덜합니다. 여하튼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게 되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보죠.


  바로 "플레이에서는 승리하고 스토리에서 패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보스 전투는 벌어집니다. 분명히 강하고 힘들지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 승리한 직후(물론 경험치 같은 보상도 받은 이후) 갑자기 이벤트가 진행됩니다.


  "하하하. 나는 삼단 변신이다!"


  그리고 전투는 벌어지지도 않고 캐릭터가 쓰러져 버립니다. 물론 게임 오버는 되지 않고 계속 이어서 일행이 사로잡히거나 하는 장면이 보여지겠지요.


  플레이어는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는 패배합니다. 그만큼 안타깝고 아쉽지만, 적어도 플레이어의 잘못은 아니기에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죠. 보스가 등장했는데 너무도 강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이길 것 같지가 않죠.


  그때 갑자기 원군이 등장하고 보스가 쓰러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전투를 해서 강제로 패배한 뒤에 아군이 도착해서 스토리로 물리치지만, 그보다는 스토리 이벤트로 위기에 빠지는 장면을 만들고, 아군이 도착해서 전투를 벌이게 하는 쪽이 더 좋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말이죠.


[ 혼자만 레벨도 MP도 보이지 않는 루시아.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기엔 충분하죠. 게다가 혼자만 자동 전투라면 더욱. ]



첫째, 원군이 얼마나 강하고 믿음직스러운지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원군은 분명히 NPC이고, 자동으로 전투를 벌일 겁니다. 리얼타임이건 턴방식이건 NPC의 전투를 묘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전투는 벌어지고 있고, 우리 일행이 공격할 때는 10 정도 밖에는 줄지 않는 HP가 원군이 공격할 때는 200~300씩 줄어듭니다.

  우왕, 굿. 엄청나게 센 원군입니다. 그야말로 고마움이 100배. 그 위력을 직접 체험하면서 원군이 없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혹시 기대하죠. '이 전투가 끝나고 우리 편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지금 그가 우리 편이 되면 밸런스가 완전히 망가지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그가 동료가 될 것을 기대하면 괜히 두근거립니다.


둘째, 스토리에서 패배하지만, 플레이로 승리하게 하여 성취감을 줍니다.


  분명히 원군이 없으면 승리하지 못할 전투입니다. 눈으로 직접 보니 더욱 절실하게 느끼겠지요. 하지만 제 아무리 약한 능력이라도 원군을 도와서 싸운 겁니다.

  그만큼 뭔가 해낸 성취감이 느껴지고, 언젠가는 원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우기 위해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원군과 함께 싸우는 전투 상황은 사실 스토리 이벤트로 처리해야 합니다.

  보스가 주인공 일행을 공격하지 않고(한방에 죽을테니) 원군만 공격하게 하거나, 원군이 보스의 공격을 다 막아주도록 설정해야 하고, 만에 하나라도 원군이 패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니까요. (주인공 일행이 막타를 때리는 것도 피하는게 좋을 겁니다. 물론 원군의 희생으로 보스가 약해진 틈에 주인공이 물리치는 구성도 가능하지만, 조금 비겁하잖아요? ^^)


  하지만 플레이어는 그것이 스토리 이벤트라는 것을 모릅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맞설 뿐이죠. 최소한 조금이라도 원군을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강대한 적을 물리치면서 힘겨운 승리의 성취감을 맛봅니다.




  게임의 플레이에는 실패가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플레이어가 잘못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실패하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이유건 플레이의 실패를 맛볼때 플레이어는 그것을 자신이 ‘잘못 플레이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자책하거나 무의미한 도전을 반복하게 됩니다.


  아니 실패만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잘못이 아님에도 플레이어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으로 불이익을 주더라도 그것을 되찾게 해주어야 합니다.



  가령 소매치기 이벤트로 소지금의 절반이 사라진다면 오래지 않아 소매치기를 잡음으로써 소지금을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력한 만큼 더 큰 보상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플레이어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저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 의욕을 불태울 것입니다.(물론 추격을 포기하는 선택기를 주고 소매치기 행위에 이유를 를 부여하는건 흥미로운 스토리 연출이 될 것입니다.)


[ 소매치기 막기 기술이 없는 상황에선 일방적으로 당하게 마련이죠? ]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실패가 필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더해지고 열심히 해서 캐릭터가 승리할 때 더욱 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실패는 게임 오버"라는 의문은 매우 타당하지만, 조금만 시점을 바꾸어 보면 더욱 즐거운 재미가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처럼 인터넷을 뒤져보고 좌절하는 상황은 겪지 않아도 되겠지요. ^^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학교 수업 중 롤플레잉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사냥하다보면 쥐 가죽처럼 쓸모없는 아이템이 나오잖아요? 그게 왜 필요한가요? 그게 없으면 리소스도 줄어들텐데. 차라리 그만큼 돈으로 주면 안 될까요?"


  타당한 의문입니다. 솔직히 쥐 가죽 같은 건 재료 아이템이 될만한 것도 아니고, 팔아봐야 얼마 받지도 못합니다. 아예 줍지도 않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죠.


[ 쥐 가죽 만든 신발? 음? 재료 아이템도 괜찮네요.^^ ]



  그렇다면 돈으로 더 주면 어떨까요? 가령 쥐가죽이 50원인데, 그대신에 100원의 돈을 더 준다면?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게임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경제 시스템과 관련한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때,[쥐 가죽] 같은 아이템은 그 가치를 조절함으로써 '게임 속의 경제'를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플레이어가 함께 활동하는 MMORPG에서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는 건 게임 플레이어의 불만을 줄이는데 중요한 만큼, 가치를 맘대로 바꿀 수 없는 화폐가 아니라 아이템의 매매가를 통해서 경제를 조절하는 건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쥐가죽'을 사용하는데는 그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게임에 대한 만족도'라는 측면이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사냥을 할때 '경험치'나 '돈'이 떨어지는 양을 일일이 세보는 스타일인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플레이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분석하거나, 역기획 자료를 만들거나 할 때를 빼면 말이죠. 심지어 퀘스트에서 얻는 경험치도 신경쓰지 않는데 무수하게 많이 잡는 '쥐'의 경험치나 떨어지는 돈을 일일이 세어볼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쥐를 잡아서 100원이 떨어지다가 200원이 떨어진다고 해도 플레이어들은 이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만족도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겠지요.


  반면 50원짜리 쥐가죽이 떨어진다면 '뭔가 얻었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납니다.


  게다가 쥐가죽을 잔뜩 얻어서 상점에 팔아 몫돈을 손에 넣을 때 다시 한번 '돈 벌었다.'라는 느낌이 들죠.



  '쥐'가 돈을 가지고 다닐리가 없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산적이나 오크가 돈이나 귀금속을 가지고 다니는건 별로 이상하지 않겠지만, 쥐가 돈을 들고 다닌다?


  애니메이션 [드래곤 퀘스트]에서는 보석으로 몬스터를 만들어서 몬스터가 죽으면 보석이 떨어지는 개념이 있었습니다.(이는 소설 [던젼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될까?]에서도 마석을 중심으로 몬스터가 생성되는 개념으로 재활용했습니다.)


  소설 [로그 호라이즌]에선 아예 몬스터가 태어날때 동전이 주어진다는 것을 세상의 규칙으로 설정하기도 했죠. 그래서 지하엔 세상의 온갖 동전이 모여드는 거대한 샘 같은 곳이 있다는 개념으로 말입니다.


  이런 설정을 통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설정을 더하더라도 그건 뒷 설정에 불과하며, 상식적으로 볼때 쥐를 잡았는데 돈이 떨어지는 건 이상합니다. '쥐 가죽'이 떨어지는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 돈이 쏟아져 내리는 던젼. 이런 설정을 부여하는건 좋지만, 그래도 쥐가 돈을 떨어뜨리는건 어색합니다. ]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쥐가죽'이라는 아이템을 모아서 파는 행위 자체가 게임 플레이. 바로 '게임과의 대화'라는 점입니다.


  '게임과의 대화'가 늘어날수록 플레이어는 내가 직접 뭔가를 하는 기분이 들고, 그만큼 게임에 몰입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그만큼 게임이 단순히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내게 있어 또 다른 삶으로서 즐거움을 더합니다.


[ 필요할 때 만나는 상인만큼 고마운 존재도 없죠. 게임 플레이에 도움이 된다면 더욱. ]


  [몬스터 헌터] 게임에서는 사냥감을 잡고 나면 해체 칼을 들고 그 시체를 해체하여 고기나 가죽을 얻도록 함으로써 그 같은 '게임과의 대화'를 더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크로우폴(Crowfall)]이란 게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광산에서 채광을 할 때, 광석 오브젝트를 클릭해서 단순히 얻는게 아니라, HP 개념을 두어 광석과의 사투를 벌이는 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울티마 온라인]에서 광산 곳곳을 파면서 광석을 모으고 대장간으로 날라서 금속 덩어리를 만드는 개념도 있습니다.


  이 역시 게임을 단순한 사냥의 반복이나 노동, 숫적인 보상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플레이어와 게임의 대화'를 생각하며 고민한 디자인 방법일 것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게임과의 대화'이며, 대화는 더욱 유기적이고 상호적일때 훨씬 재미있는 법입니다.


  100원이라는 돈 대신에 [쥐가죽]이라는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디자인에는 바로 이 같은 고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곤 해도 '쥐가죽'보다는 훨씬 있어보이는 아이템을 얻게 하는게 나을 겁니다. 아니 솔직히 쥐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조금 부끄럽지 않나요? ^^


  오래 전에 제가 게임 [울티마 온라인]을 할 때 열심히 키운 대장장이로 칼싸움을 벌이다 토끼에게 맞아죽고 쥐하고 10분 동안 열심히 싸운 경험이 있지만...(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쥐 이겨라!'라고 응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칼을 든 전사라면 그래도 늑대 정도하고는 상대해야죠. 아니면 거대한 낫을 든 키 2미터짜리 거대 쥐라던가.


[ 토끼에게 맞아 죽은게 부끄러운건 아니죠. 부끄럽지는 않은데... ]


  그래도 돈 100원보다는 50원짜리 '쥐 가죽'이 좀 더 뭔가 얻은 느낌을 더합니다. 아이템을 얻었다는 느낌만이 아니라, '쥐 가죽'이 숫자만으로는 처리되지 않는 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더욱이 그것이 저 멀리 눈 덮인 산에서 이따금 발견된다는 전설적인 [스노우화이트 설표의 가죽] 같은 것이라면 뭔가 얻은 보람도 더 클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판매용 드롭 아이템'에 불과하더라도.


이따금 마을에서 [쥐 가죽](아니 [스노우 화이트의 설표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 발견되거나 한다면 더욱 그럴듯해 보일 겁니다. 왠지 내가 그 세계의 생활에 이바지한 느낌이 들테니까요.(더욱 이상적인 것은 유저들이 [스노우 화이트의 설표 가죽]을 많이 구해다 팔수록 그 물건이 더 늘어나 보이게 하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복잡해지겠지요.^^)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로 그런 마음을 잘 생각하는게 훌륭한 게임 디자인. 게임을 단순히 반복 노동이나 작업이 아니라, 탐험할만한 세계로 느끼게 하도록 도와주는 디자인 방법입니다.


  "왜 쥐가죽이 필요한가요?"


  학생의 이 질문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고, 이제껏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생각을 제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면 그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하겠지요.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