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작품 이야기 2012.02.29 18:03
 “슈퍼맨”과 함께 DC 코믹스의 대표적인 히어로인 “배트맨”은 수많은 슈퍼 히어로물 중에서 가장 차별되는 존재입니다. 경쟁사인 마블의 히어로와 굳이 비교하자면 “아이언맨” 같은 캐릭터이지만, 전차포를 맞아도 끄떡하지 않는 아이언맨의 갑옷과 달리 배트맨의 복장은 총알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고 하늘을 날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힘도 보통 사람보다 조금 센 정도고 격투기 능력이 뛰어나긴 해도 슈퍼맨 같은 이들에 맞설 정도는 아니지요. 슈퍼맨조차 묶을 수 있다는 원더우먼의 밧줄이나 헐크의 공격도 막아낼만 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물론 투시력 같은 것도 없지요.

  영화를 보면 그의 복장은 케블라로 만들어 총알을 막아내고 그의 망토는 화염조차 피하도록 해 주지만, 원작인 코믹스에선 맨손으로 싸우다 찣어지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총 같은 무기를 쓰지 않고 대개는 맨손, 고작해야 박쥐모양의 표창 정도만을 사용하고 있지요.

  그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이 악당과 싸우다 그들의 무기에 당한 상처이지만, 때로는 밧줄이 끊어져서 땅에 떨어져서 죽을 뻔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는 배트맨이 여느 히어로완 달리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는 증거물이지요.

  그럼에도 그가 범죄의 도시 고담시에서 ‘공포의 존재’로서 군림하는 것은 범죄에 대한 강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뛰어난 지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를 보면 배트맨은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는 초인처럼 여겨지지만,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가져오는 박쥐 모양의 코스츔 아래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괴로운 운명을 맞이한 ‘소년’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배트맨은 아직 어린 로빈을 친구이자 동료로서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만...

  D.C.코믹스. Detective Comics(탐정 만화)라는 제목의 잡지에서 연재가 시작된 배트맨은 액션물인 동시에 탐정물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범죄자와 직접 맞서서 그들을 물리치지만, 그 과정에선 싸움보다도 다양한 추리로 범인을 몰아가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배트맨은 야경꾼인 동시에 탐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등의 영화에서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의 면모를 엿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커의 정체를 파고들려고 노력도 해 봤고, 수많은 물품을 조사하여 조커의 살인 계획을 막아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영화 속의 배트맨은 비교적 적이 명확했기 때문이지요. 도리어 <배트맨 포에버>에서 리들러(에니그마)가 배트맨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는 부분이 좀 더 ‘탐정물’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내에도 소개된 여러 코믹스에선 이와는 다른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령, 2008년에 출간된 <배트맨 허쉬>에서 배트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죄자의 종적을 찾아서 수많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누군가의 공격으로 두개골 골절로 죽을 뻔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슈퍼맨마저도 범인의 음모에 휘말려 배트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감추어진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것이지요.

  <배트맨 허쉬>는 배트맨 시리즈만이 아니라 제가 보았던 여러 히어로물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더욱이 한 컷 한 컷 섬세하고 완성도 높은 그림으로 재미를 더해주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에 본 <배트맨 롱 할로윈>은 <배트맨 허쉬>의 재미를 확실히 뛰어넘은 작품이었습니다. 더욱이 영화 <배트맨 비긴즈>나 <다크 나이트>와도 어느 정도 관련되었다는 느낌에서 좋은 작품이었지요.




  사실 저는 이 작품을 <배트맨 비긴즈>의 DVD 패키지에서 먼저 보았습니다. <배트맨 비긴즈>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저는 2DISC의 특별판 DVD를 바로 샀는데, 바로 여기에 배트맨 : 롱 할로윈의 초반부가 실려 있었던 것이지요.

  <배트맨 비긴즈>의 DVD 케이스에는 하비 덴트의 집이 폭파되는 장면까지만 소개되었던(그래서 뒷 얘기가 무진장 궁금했던) 이 작품이 정식으로 출간된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보면서 기쁨은 배가 되었지요.


  <배트맨 : 롱 할로윈>은 <배트맨 : 허쉬>보다 한참 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꼭 연결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국내에 나온 작품으로 굳이 비교하면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어 원>에서 조금 뒤의 이야기라고 할까요?

  배트맨 시리즈의 세계에서 고담시는 대개 광적인 범죄자들과 그들에게 공포를 불러오는 배트맨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고담시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이 아닙니다. 바로 마피아들. 마로리 패밀리와 팔코네 패밀리이지요.

  오랜 라이벌 관계인 그들은 현재의 마피아가 그렇듯 겉으로는 건전한 사업을 꾸리는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고담시의 모든 분야를 파고들어 거대한 권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물론이고 검사마저도 썩어 문드러질 만큼 부패하였고, 당연히 그들의 권력을 건드릴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지요.

  여기서 지방 검사인 하비 덴트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경찰인 고든,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능력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배트맨과 손을 잡고 마피아 집단을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누군가에 의해 팔코네 가 보스의 조카 조니 비티가 살해되면서 문제에 부딪칩니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하비 덴트의 집에 폭탄이 배달되고 팔코네 패밀리 관련 인물들이 계속 살해되는 것입니다. 기념일마다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서 ‘홀리데이 킬러’라 불리는 범죄자를 잡고자 팔코네는 스케어크로우를 비롯한 광적인 범죄자들을 끌어들여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지요.

  
  <배트맨 롱 할로윈>은 액션 만화가 아닙니다. 한 편의 거대한 추리 서사극이지요.

  마지막 장에 이르기 전까지 홀리데이 킬러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비 덴트나 고든은 브루스 웨인을 의심하고,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의심하기도 하는 등 서로 간에 추리와 수수께끼가 뒤엉켜서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지요. 여기에 조커를 비롯한 여러 ‘광적인 범죄자’들의 기행과 두 마피아 조직의 인물들 간의 암투가 뒤섞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는 홀리데이 킬러의 정체는 정말로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정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도 못했던 인물이거든요. 하지만, 일단 정체를 알고 다시 살펴보면 여러 힌트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책을 몇 번이고 다시 펼치게 합니다.

  <배트맨 롱 할로윈>은 그 단독으로 완벽하게 완결된 거대한 추리극인 동시에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거대한 추진력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 속에는 과거에는 고담시를 지배했던 마피아들이, 조커 같은 광적인 범죄자들로 대체되고 배트맨이 공포로 지배하는 도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정의로운 지방 검사 하비 덴트마저 그 광기에 중독되어 ‘투 페이스’가 되는 것이 이러한 분위기를 더해주지요.

  이 같은 이야기를 보완하는 것이 그 독특한 그림체입니다. <배트맨 허쉬>에서는 가능한 사실적인 그림체와 화려한 색상이 돋보였는데, <배트맨 롱할로윈>은 거의 흑백 영화를 보는 듯 절제된 색체와 딱딱하면서도 깊은 인상의 그림체로서 이야기의 분위기를 더해갑니다. 영화 [대부]를 보는 듯한 깊이를 느끼게 하지요.


  한 가지 기대되는 것은 멋진 이야기와 그림으로 이 명작을 완성해 준 제프 로브와 팀 세일 콤비가 이 이야기의 1년 뒤를 다룬 ‘배트맨 : 다크 빅토리“를 집필하였고, 이 책도 조만간 세미콜론에서 출간될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콤비가 만든 악당들을 다룬 단편, ‘헌티드 나이트’도 기다려집니다만...
posted by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